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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사도 바울처럼" 딤후 4:7절 2014년 8월 3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8-03 | 조회: 141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최근 폭염주의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환우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고, 특별히 필리핀에 단기선교를 떠나 있는 담임목사님과 사랑하는 장로님 집사님 청년들을 위하여 많이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나라의 구제역과 서아프리카의 에볼라 바이러스로 인하여 많은 죽음이 더 이상 생기지 않고 고칠 수 있는 백신과 여러 대처 방안들이 생기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최근에 더위 때문에도 고생하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 네 명의 자녀들을 키우느라 아내보다는 덜 그러나 아버지로써의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다. 문득 옛날 어르신들의 말씀처럼 차라리 아기로 누워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는 말씀이 점점 실감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중에서 아이들이 커갈수록 더 많이 자기 표현을 하기 때문에 부모의 입장에서는 더 힘들어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네 아이를 키우다 보니 아버지로써 모두 다 귀하고 사랑스럽지만 가끔은 이쁜 자식이 있기도 하고 미운 자식 있기도 합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가끔은 안 아픈 손가락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쁜 자식은 말 그대로 말 잘 듣고 예쁜짓 하는 아이고 미운 자식은 자기 고집 부리며 대드는 아이입니다. 너무 화가 나서 말 안 듣는 아이의 궁둥이를 때리기도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다 내 자식인데 네 아이 모두 항상 같은 사랑으로 똑같이 대해주어야 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본문을 묵상하다가 “그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너 참 말 안듣는구나!!“ 그리고 내가 그리스도인이라 할찌라도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 예수님을 핍박한 것처럼 나도 때로는 그렇게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소름끼치지만 실제로 저의 삶을 돌아보면 가끔은 목사이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참 안듣는 경우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하는 교회와 지체들에게 쓴 여러 편지들의 내용을 보면 많은 부분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씀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예로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빌3:17)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 말씀이 있습니다.

도대체 사도 바울은 무엇을 본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는 내가 살아 온 것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길을 마칠 때까지 잘 달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꼭 믿음을 지키십시요!!라고 당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열심히 살다가 문득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이러한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바쁘고 힘들게 살아야 할까? 마치 끝없는 터널을 지나는 것처럼 삶의 무게 속에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 것도 이제는 지쳐간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에서 어려움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또는 승진하기 위하여, 자신의 사업체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이른 새벽부터 늦은 저녁까지 앞만 보고 일을 합니다. 그러다가 모든 에너지가 바낙났을 때 드는 생각이 이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것 같은 힘겨운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우리를 보고 주님께서 너희는 내 안에 거하여야 한다. 그래야 기쁨인 충만하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요15:9-11)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지 못하는 이유와 자꾸 지쳐가는 이유는 내 힘으로 내 방식대로 세상과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실 수 없을 정도로 빼곡이 그려진 나의 일과 속에서 비록 두렵기는 하지만 자기 암시와 자기 만족으로 힘을 얻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바울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했을 때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고 핍박하며 자신만의 신앙과 신념! 삶의 방식과 계획대로 살았었습니다. 그는 나름대로 최고의 배경을 가졌었고, 자신이 세운 최고의 목적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할 때 그의 삶 속에서는 오직 주님을 위하여 최고의 삶이 아닌 최선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주님 안에 거하자 자신이 주님께 드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탁월한 지식과 배경도 돈과 명예와 잘못된 신앙생활도 주님께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오직 복음을 위하여 최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 최선의 삶은 자신을 드리는 것이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아무리 힘들어도 그 상황 가운데 주님을 향한 그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절로 27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참으로 많은 고생을 했구나라고 생각이 듭니다. 맞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따라할 수 없는 많은 고생을 하였지요!!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일들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 일들이 있었기에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다고 말합니다.

이 고난이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바로 복음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싸울 때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한 싸움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기전 그는 주님을 모른체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이 선한 싸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그러한 일들을 통하여 적어도 자신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그의 삶에서 드려진 선한 싸움은 세상에 대항하여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싸우는 것도 아니고, 오직 복음을 위하여 일어나는 고통과 고난, 힘듦을 감내하는 것이였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

진짜 선한 싸움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매일 매일이 너무 버겁고, 그 무게가 견딜수 없을 것 같지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으면 살 수 있다.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 주의 말씀을 좇아 살면 내 삶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고 죽을 힘을 다해 사는 것입니다.

시편의 고백처럼 우리가 주님 품에 안길 때까지 우리 삶에는 무수히 많은 죽음의 도사림들이 있습니다. 언제 깊은 계속으로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언제 맹수가 나타나 우리를 찢어 죽일지 모릅니다.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머리 위로 바위가 떨어져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두렵고 불안한 삶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리는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보호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내가 연약한 순간에도 주님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이 사망의 움침한 골짜기가 끝나고 밝은 초원으로 나올 때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백의의 천사로 널리 알려진 나이팅게일은 30세 되던 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이다. 주님, 저도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에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은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 그리고 나이팅게일은 많은 사람들을 섬기는 간호사로서의 헌신된 삶을 살기로 결심했습니다. 후에 한 기자가 “성공적인 인생의 비결이 무엇이냐?”라고 묻자 그녀는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불러 주신 그 뜻에 나를 맡기고 끝까지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나의 달려 갈 길은 주님이 가신 길을 말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말씀처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그의 마음 속에는 오직 주님의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갇힐 때와 매맞고 조롱거리가 되었을 때도 여전히 주님을 향한 마음만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를 향하여 달려가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견뎌 낼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싸움을 하며 주께서 함께 하시는 그 길을 마치며 고백하는 말은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바울이 말한 믿음은 무엇입니까? 왜 그는 자신처럼 믿음을 꼭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 세상이 믿음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제가 고민한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일찌라도 주님을 핍박하는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였습니다.

그저께 철야예배 때 잠깐 나눈 말씀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작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성도들을 향하며 온갖 방법으로 도발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에 대하여 특별한 진노를 쏟아부으시거나 우리가 억울한대로 앙갚음을 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에 대하여 하니님의 결정은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하나님께서 관심과 마음을 두시는 것은 우리가 더 하나님편으로 살아가도록 이끄시는 더 마음을 쏟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세상과 하나님을 번갈아 볼 때 마치 세상이 더 격렬하게 힘 있어 보이고 잘 변하지 않는 나를 상대하시는 하나님은 더 힘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존재로부터도 절대 흠을 입거나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다만 사랑하는 자녀의 눈물에 움직이실 뿐입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그 믿음이 잘 성장하지 않는 나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신다는 것입니다.

창2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유일한 기쁨이였습니다. 그의 가문을 이을 유일한 존재였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복의 통로로 주신 귀한 독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자 번제의 제물로 요구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순종합니다.

이 상황에서 그의 믿음을 볼 수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7,8절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들 이삭과의 짧은 대화입니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제사 드릴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삭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유일한 의지의 대상인 아버지가 자신을 번제물로 죽일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실것이다”말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라는 고백 속에는 하나님께서 설마 죽이시겠는가?라는 의심도 아닌 번제 드릴 곳에 가면 분명히 번제 드릴 양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도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도 아닌 이삭도 아닌 오직 하나님만 신뢰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험이겠지라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결정하셔서 진행하시면 그것으로 완전하다는 신뢰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서 고백하는 “믿음을 지켰다”는 이 고백은 자신이 걸어 온 파란만장한 인생길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인도하셨던 길임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께 무엇을 드렸습니까? 여러분 자신 아닙니까? 학벌, 물질, 인맥, 명예, 권력 등의 화려한 삶의 조건들로 화장 치장 분장 한 모습이 아니라 초라한 죄인의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 그 모습 그대로 주님께 자신을 드렸잖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조용한 저녁 가족도 잠들고 아무도 없는 한적한 시간과 장소에서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요!
나는 지금 선한 싸움을 싸우며 살고 있는가! 나의 달려 갈 길이 정해져 있으며 하나님께 힘을 의지하고 있는가! 그리고 다메섹 도상에서 만난 주님께 드렸던 그 믿음의 약속을 지금도 매 순간 드리며 사는지 말입니다.

같이 찬양합시다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더 조용히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만드십시요! 하나님께서 힘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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