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회원가입

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고통과 은혜의 함수관계" 엡 3:7-13절 2014년 7월 20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7-20 | 조회: 1698
고통과 은혜의 함수관계 엡3:7-13. 2014. 7/20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을 힘입고 교단에서 그 동안 추진을 했던 필리핀의 사먀르(samar) 섬의 한 학교와 두 군데 교회를 완공한 곳에 예배를 드리고 오게 되었습니다. 작년 11월에 12m가 넘는 파도가 몇 개의 섬을 강타했습니다. 10000여명이 죽었습니다. 그 가운데 아이들만, 6000명이 넘었습니다.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복구가 안 된 아픔이 서려 있는 현장입니다.

그런데 타클로반에서 사먀르(samar) 섬에 갈 때 시그널 Ⅱ 태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가야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빗길을 해치고 2시간 30분을 차를 타고 학교에 도착을 했습니다. 학교는 건물이 세워진 것을 감격하며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행사 준비를 해왔는데 밤에 태풍이 분 것입니다. 그래도 이 태풍이 비껴감으로 행사를 치룰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나오는 날 마닐라에 특급 태풍이 불어 비행기가 뜰 수 없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비행기는 뜨지 않죠? 태풍은 불죠? 잘못하면 한국에 제 날짜에 갈 수 없죠? 그러면 교회와 성도들이 얼마나 염려 할까? 그래서 교역자 분들께 기도 부탁을 하면서 이런 생각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타클로반에서 하루를 더 보내면서 마닐라로 갈 수 없는 상황 앞에 이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러 왔는데 왜 길을 막으시는가? 그러면서 이 본문의 말씀이 생각이 났습니다.

오늘 함께 대하는 본문에는 성경 안에 흐르는 거대한 두 주제가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로, ‘고통이란 단어와 은혜란 단어’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 삶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이것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두 주제는 막연한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고통과 은혜는 해독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인과응보적 법칙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행함에 대한 보상과 처벌의 원리를 예외 없이 적용하고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 잘하면 상을 받고 실수하면 실수한 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원리에 아주 익숙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법칙에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욥기를 보면 욥은 너무나도 의롭고 경건한 삶을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순간에 재산과 자녀들, 건강까지 다 잃는 초특급 재난을 당합니다. 이때 욥의 친구들은 그 고난을 해석하려고 합니다. 욥을 도와주려고 하지만, 욥에게는 아주 아픈 이야기입니다. “욥, 회개해야 돼. 네가 분명히 잘못한 것이 있는 것 같아. 죄 없이 망한 자가 어디 있느냐?” 이것이 인과응보적인 해석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통에 대해서 너무 쉽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한다고 하는 말이 속을 뒤집어 놓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는 조언을 하기보다 손을 잡고 함께 울어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인과응보적인 법칙에 익숙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고난이 있을 때 노골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지만, 은근히 저 사람에게 무슨 숨은 죄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무엇인가 고통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고통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복잡하고 난해해서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다면체입니다. 한 가지로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수많은 고통에 연관됩니다. 태어날 때부터 고통으로 시작됩니다.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 찾아올까? 암에 걸리고 싶어서 걸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암이 찾아옵니다. 이것을 해석할 수 있을까요? 유전자의 문제? 형제라고 다 걸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담배를 피우는데도 폐암에 걸리지 않고 잘 삽니다.

교통사고도 그렇습니다. 자동차들이 중앙에 선을 하나 그어놓고 수없이 오고 갑니다. 알고 보면 아찔한 일입니다. 술 먹고 중앙선을 넘어오면 언제든지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운전을 잘하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10여 년 전에 <지선아, 사랑해>로 알려진 이지선 자매도 교차로에 가만히 서 있는데 음주운전을 하던 사람이 일방적으로 박아 전신 55%에 3도 화상을 입고 꽃다운 나이에 온몸이 녹았습니다. 인생이 고통의 한가운데로 들어간 것입니다. 내 잘못이 아니라 나와 전혀 상관없이 닥치는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어떤 때는 고통을 해석하려는 것 자체가 잔인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날 때부터 난치병을 앓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100만 명 중의 한 명 정도가 걸리는 병에 걸린 아이를 기르는 부모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예상이나 했을까요? 이 고통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고통에 대해 이해할 만한 설명이 붙지 않습니다. 욥기서에서 욥이 당하는 진짜 고통은 고통의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매를 맞아도 이유라도 알고 맞아야 하는데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은 더 깊은 고통으로 몰고 갑니다. 그런 순간에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 살아 계세요?”, “내가 고통을 당할 때 어디에 계셨습니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에 대해서 침묵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고통의 깊은 곳에 있을 때, 하나님이 고통에 대해서 설명을 하신들 우리가 납득이 될까요?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자식을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는 부모의 아이가 말썽을 피우고 속을 썩이는가 하면, 불신자 가정의 엄마는 날마다 놀러만 다니고 자식이 고 3인지 고 2인지도 모르고 신경을 안 썼는데도 일류대학에 들어가서 장학금을 받아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설명이 잘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날 동안 고통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인류가 죄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인간에게 고통은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이 세상은 거대한 고통의 도가니와 같습니다. 죄악된 세상에서 고통은 불가피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면서 문제가 지나면 또 하나의 문제가 파도처럼 다가옵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고통의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다루지 못하면 인생이 한순간에 침몰할 수 있습니다. 고통이 폭군처럼 거칠게 몰아치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무릎을 꿇습니다. 욥은 그에게 닥친 고통으로 태어난 것을 저주했습니다. 문제는 고통 자체보다 고통에 대한 바른 이해와 믿음의 태도입니다. 고통을 바로 다루지 못하면 인생이 침몰하게 됩니다. 고통 때문에 원망과 자학과 저주로 가득 찬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이 고통이 저주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내 인생에 다가오는 축복인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고통이 더 이상 저주나 불행으로 끝나지 않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을 때가 많지만, 설명 대신 우리에게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고통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놀라운 것은 그 고통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사도바울은 당시 헬라철학의 대가였습니다. 세계적인 석학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그는 헬라 철학의 흐름을 알고 있었고 인생의 흐름과 이치를 알고 있었고 자연의 흐름과 사람들의 생각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존경할만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셋 중에 한가지만이라도 얻기 위해 일평생을 투자하는데 바울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자신이 가진 것들을 배설물과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구속의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했었고 자신의 신념 때문에 사람을 죽일 정도로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러나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자신은 자신의 운명하나 바꿀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자였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고 그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8절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측량할 수 없는(ajnexicnivaston)’이라고 하는 말은 ‘파악을 할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찾아낼 수 없는’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파악하거나, 이해하거나, 찾아내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예수와는 상관없이 살았던 자신이 어찌하여 사도가 되었고, 이 복음을 깨닫게 하셨는지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모든 삶의 이유는 그분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세상, 무엇을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이 은혜의 원리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지금 그는 차디찬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제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고통 속에 있는 자입니다. 그가 받은 은혜는 크지만, 그의 현실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 그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었어도 그는 은혜의 깊이에서 그것을 아파하거나 그것 때문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고, 자기가 그렇게 거부하고 배척했던 복음을 오히려 세상 앞에 전하는 즐거움 때문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정말 구원받았다는 것은 미스테리입니다. 은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기치 않는 고통으로 인생의 밑바닥을 기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한다면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다시 일어설 줄 믿습니다. 설명이 안 되는 고통으로 절망하는 우리에게 설명이 안 되는 은혜가 덮어지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기억하십시오. 인생은 고통의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은혜 없이 고통만 당하면 진짜 죽습니다. 그러나 고통 자체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고통을 압도하면 고통은 저주가 아닙니다. 은혜 없이 당하는 고통이 저주입니다.

은혜 안에서 고통이 다루어지면 그때부터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더 풍성한 세계로 이끄는 비밀이 됩니다. 이 비밀을 아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선아, 사랑해>의 이지선 자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고난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고난이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비밀이 무엇일까요? 은혜입니다.



성도 여러분, 고통도 신비이고 은혜도 신비입니다. 알 수 없는 고통으로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겪는 고통을 다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일방적으로 주셨습니다. 왜 나를 택해주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한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세상이 험하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고통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보다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이 좋은 선수들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카메라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선포하는 것을 보면 참 감동적입니다. 그 선수가 흘렸던 땀과 눈물, 숱한 세월 동안 고통스러운 훈련을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라니 기가 막힙니다.

내가 아무리 피눈물 나는 훈련을 했다 해도 그 메달을 걸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불가능했다는 진심 어린 고백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은혜를 알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설명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거대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내 인생을 붙들고 있기에 내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수많은 고통이 다가오겠지만, 그 고통보다 더 큰 은혜가 내 인생을 세우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환난의 연속입니다. 누구도 환난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나그네와 같습니다. 육체적인 질병, 고통, 이별, 슬픔, 배신, 경제적인 손실, 사업의 실패, 가정의 어려움 등 연속되는 환난의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환난 속에서 사도 바울은 고난으로 끝나는 비참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큰 영광을 현실로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굶주리면 배가 고프고, 몸이 아프면 신음하고, 역경이 휘몰아치면 고뇌하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바꾸어 살았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감옥을 별장으로 바꾸었습니다. 고난이 휘몰아치면 그 고난을 영광으로 바꾸었습니다.

가난에 처할 때는 가난을 하늘의 부요로 바꾸었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흐를 때는 찬란한 미래를 보는 영롱한 빛으로 바꾸었습니다. 어떻게 그 일이 가능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후 4:1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 사도 바울은 환난을 잠시 받는 것으로, 가벼운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또한 환난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얻는 기회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환난을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대한 것을 이루려는 목적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난이 나에게 찾아오지 않는 것, 나에게 주어진 고통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있으면 세상은 아름답게 변합니다. 모든 것을 바꿀 수 있습니다. 분명히 인생에서 고통의 문제는 힘들고, 아프고, 때로는 죽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고통을 아름답게 바꾸는 위력이 있습니다. 이제 더이상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이!”라고 하지 말고, 고통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되었다면 축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나의 노력, 능력, 잘남이 아니라, 예기치 않는 순간에 다가와 나의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만 있다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롬 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 내가 내 힘으로 인생을 버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과 재주와 노력, 그런 것들은 한방에 바람과 함께 날아가 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고통이 난무한 세상 가운데 삽니다. 피해 갈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우리를 절망하고 좌절하게 할 수 있지만, 또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그 고통을 에워싸는 고통과 은혜의 이중주 속에서 우리는 고통에 매몰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더욱 비상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수 있는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가 우리를 사로잡는다면 우리는 넉넉히 이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통 속에 혼자 몸부림치지 마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나오셔서 그 은혜를 누린다면, 고통이 영광이 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그 고통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결코 무의미하게 내던져진 존재가 아닙니다. 역사는 반드시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웅대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선택하셨으며, 마침내 풍파가 없는 천국의 항구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소망을 갖고서, 질병과 고통과 가난과 배신과 사랑하는 가족과의 사별의 아픔 같은 모든 환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 목록으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