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출4:1-10절 2014년 7월13일 주일 설교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7-13 |
조회: 1802
미국 미시간 주에 있는 NPW(New Product Works) 박물관은 아주 희한한 곳입니다. 이곳에는 무연 담배, 무색 콜라, 스프레이식 치약 등 그동안 연구 개발은 완료되었지만, 결국에는 실패로 귀결된 수 만여 점의 제품이 진열돼 있습니다. 1965년부터 40년 간 소비자들로부터 외면당해 세상에 나오지 못한 제품들이 세 개의 벽면을 둘러가며 세워져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실패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처음엔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한 이 곳이 지금은 코카콜라, 미쓰비시, P & G 등 거대 다국적 기업에서부터 중소기업까지 신제품 출시 전에 관계자들이 꼭 이 곳을 거쳐갈 정도의 명소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일단 제품이 시장에 출시된 후 실패라는 쓴잔을 맛보게 되면 막대한 경제적 비용 손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실패를 거치지 않고 인생에 성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살다보면 입학시험이나 승진 심사에서 떨어질 때도 있고, 사업에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에는 다 행복한 결혼을 꿈꾸지만 결혼 생활에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친구가 되고 아무에게도 적이 되지 않겠노라고 다짐하지만 인간관계 역시 쉽지 않습니다. 때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며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깨어진 관계 때문에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런저런 실패는 연약한 인간이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숙명입니다. 아무도 실패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문제는 거듭되는 실패를 겪고 나서 실패 공포증에 빠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속에 빠져 삽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은 모세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모세야 네 손에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목자의 상징인 지팡이를 들고 있는지 몰라서 묻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열등감으로 가득 차 광야에서 의미 없이 살아가던 모세를 일깨우고, 그의 인생을 아름답게 사용하시기 위해 하셨던 광야의 한 벌판에서 주님이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세에게 찾아가셔서 질문하신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나름대로 삶의 기준을 갖고, 여기까지 살아온 삶의 결실이 지금 무엇으로 남아 있습니까? 광야의 모세처럼 어느새 희망을 포기하고 하루하루 현실에 매여서 꿈도 기쁨도 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은 짧게는 금년 1년을 시작하면서, 나아가서 일평생 살아온 삶의 결실이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작은 희망이나 사랑, 믿음을 찾아 볼 수 없는 영적 메마름으로 두 손에 들려있지는 않은지 묻고 계신 것입니다. 왕의 지팡이가 들려져 있어야 할 모세의 손에 대신 목자의 지팡이가 놓여 있는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Ⅰ. 여기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하는 질문은 너의 현주소가 어디냐는 것입니다. 모세는 히브리인이었지만 바로의 공주 아들이 되어 왕족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왕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모세는 Thutmoses 3세 때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모세라는 이름이 히브리어로는 ?물에서 건진 아이?이지만, 이집트 언어로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뜻으로, 사랑과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애굽을 포함한 근동지방을 통치할 만한 능력과 지식과 힘을 가지고 있었고 시대의 흐름을 읽고 역사를 분석해낼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 다.
그러나 그가 가진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했던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민족을 위해 힘썼지만, 결과적으로는 자기 민족들로부터 배척을 당했습니다. 자기 생명하나 건지기 위해 왕궁을 떠나 광야로 도망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왕자로 있다가 광야로 도망치게 된 모세는 아마도 마음에 수많은 갈등을 겪었을 것입니다. ?이게 아닌데, 원래 꿈꾸던 삶은 이게 아닌데……. 일어서야지, 일어서야지.? 다시한번 일어서야 한다는 꿈으로 몸부림쳤지만, 한번 무너진 삶이 그렇게 쉽게 일어서게 하는 게 세상이 아니지 않습니까?
모세 역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양을 치는 목자 이상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처절하리만큼 느꼈을 것입니다. 자신의 꿈과 희망을 모두 이 광야에 묻어야만 했습니다. 그의 활동무대는 더 이상 왕궁이 아니었고, 고상한 인격과 세계역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 민족을 이끌고 나갈 수 있기 위해 받은 훈련들이 이 광야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단지 좋은 목초지가 어디 있는지를 살피고, 어린양의 울음소리에 긴장하고 달려가야 하는 그저 평범한 목동이었습니다.
자기의 꿈을 묻은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제대로 버티지 못하는 광야와 목자의 상징인 지팡이 뿐이었습니다. 또한 모세가 받은 자연 속에서의 연단, 광야의 고독을 통한 깊은 묵상도 영적인 삶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셔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만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만한 영적인 감각이 그에게 없었던 모습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미 그의 영성은 황폐 될대로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Ⅱ. 그런 그에게 "네 손에 있는 것, 그것을 땅에 던지라"는 것은 ‘네 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믿고 있던, 자신을 지탱해주고 자신을 지켜주던 바로 그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그 하나까지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양치는 사람에게 지팡이는 필수품입니다. 비록 보잘 것 없는 마른 막대기에 불과하지만, 험한 산을 넘어야 하고, 오랫동안 길을 걸어야 할 때는 지팡이가 없으면 안 됩니다. 또 때로는 이리나 늑대가 양을 잡아먹기 위해서 달려올 때 그 짐승들을 쫓아내는데도 이 지팡이를 사용했습니다. 그러기에 양치기들에게 지팡이는 꼭 자기 손에 잡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에게도 그 지팡이는 중요한 것입니다.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 지팡이가 없으면 양치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그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 그랬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성지순례를 다녀오지 않아서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터키의 이스탄불에 있는 ‘톱카피(Topkapi) 박물관’을 가면 모세의 지팡이가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박물관에 전시된 그 지팡이의 볼품없는 모양에 실망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하면 ‘십계’라는 영화에서 찰톤 헤스톤이 들고 있던 크고 멋지게 생긴 지팡이를 연상합니다. 그런데 톱카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모세의 지팡이는 길이가 겨우 1미터 남짓에, 굵기는 대나무보다 더 얇아 지팡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약간 굵은 회초리라고 하는 편이 훨씬 어울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이드에게 ‘정말 모세가 사용하던 지팡이가 맞느냐’고 질문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성경을 통해 우리는 모세의 지팡이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대도 그 익숙한 것을 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는 ‘이것만은 절대로 안 됩니다. 이건 비록 보잘 것이 없는 것이지만 제게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땅에 던져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땅에 던지지 않았다면, 모세의 지팡이는 평생 모세의 지팡이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 또한 평범한 노인으로 그의 인생이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께서 던지라고 하시니까 던졌습니다.
모세가 그동안 자기 손에 잡고 있던 지팡이를 던졌더니 그것이 뱀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겁이 나서 얼른 피하였습니다. 자기가 붙들고 있었을 때는 그저 마른 막대기에 불과했는데, 하나님의 명에 따라 땅에 던졌더 그것이 뱀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뱀이 된 그 지팡이를 다시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독사를 잡으려면 목을 쥐어야지 꼬리를 잡으면 홱 돌아서 물게 되기 때문에 꼬리를 잡는 것은 독사를 잡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꼬리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신대로 꼬리를 잡았더니 홱 돌아서 무는 것이 아니라 도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하면 틀림없이 실패할 것이 분명할지라도 하나님이 하라 하셔서 했을 때는 내게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다시 손에 잡은 지팡이는 이전의 지팡이가 아닙니다. 새로 붙잡은 지팡이는 뱀이었는데 하나님이 잡으라고 하셔서 두렵지만 말씀에 의지해서 붙잡은 뱀이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 그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땅에 던져진 모세의 지팡이는 더 이상 모세의 지팡이가 아닙니다. 이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하나님의 지팡이입니다. 그래서 20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말라깽이 나무 지팡이가 금지팡이로 바뀐 것도 아닙니다. 그대로 말라깽이 나무 지팡이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하나님의 지팡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내가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지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애굽을 향해 출발하는 순간부터, 모세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다같이 20절을 읽겠습니다. “모세가 그의 아내와 아들들을 나귀에 태우고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그 동안 양을 치던 모세의 지팡이가 이제 무슨 지팡이로 변했습니까? 하나님의 지팡이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초자연적인 역사를 일으키는 능력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모세가 그 지팡이를 바로 앞에 던졌을 때 살아있는 뱀이 되었고, 바로의 마술사들이 만든 뱀들을 삼켜 버렸습니다. 모세가 그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었을 때에는 홍해가 갈라져 마른땅같이 되었고, 반석을 쳤을 때에는 그 반석으로부터 모든 백성을 마시게 하는 생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 지팡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길을 향하여 가는 40년 동안 수많은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모세와 함께 하자, 양치기가 능력의 사람이 된 줄로 믿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나아가자, 양을 치던 평범한 나무 막대기가 온통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의 지팡이가 된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대목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2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질문하실 때, “네 손에 없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일하시기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지금 모세가 자신의 손에 있던 지팡이를 주님의 손에 맡길 때, 그는 더 이상 실패자의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 능력의 지팡이를 붙잡고 한 생을 당당하게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입니다. 이 연합된 자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 십자가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성 어거스틴은 “우리가 구원받기 이전에는 죄를 안 지울 수 없는 자였으나 구원받은 후에는 죄를 안 지을 수 있는 자가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주님이 내게 성령을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 도우심이 우리와 함께 한다면 이제 우리는 죄의 지배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죄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만으로는 죄에서 승리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려면 하나님께 자신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바치지 않고 드리지 않을 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통치하고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롬:12-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의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나를 다스리고 통치하실 때 나의 삶의 온전한 주인이 되실 때 비로소 주께서 약속하신 빛나고 거룩한 삶의 승리를 오늘 여기서도 체험할 수 있다는 놀라운 가능성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하는 삶을 사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릴 때, 주님은 우리를 ‘의의병기’로 사용하십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무기라는 단어는 영어의 ( 웨폰)가 아니라 ‘악기’라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에 피아노가 있습니다. 이 피아노를 제가 연주한다면 바이엘 10번 정도 그것도 서툴게 연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본 교회 성가대 반주자가 연주하면 동일한 피아노이지만 소리가 달라집니다. 원리는 이와 같습니다. 내 인생, 내 삶을 누가 잡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나의 삶의 가치가 달라집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붙잡고 사용하시면 내 인생은 걸작의 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세상의 학문이, 재물이나 인기가 내 인생을 붙잡고 연주하면 내 인생의 소리는 그것밖에 안 될 것입니다. 누가 나를 연주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주께서 자기를 써 주심을 날마다 감사했던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주여! 어찌하여 나를 초지에서 불러내어 이처럼 존귀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나이까” 푸른 초장에서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을 하나님이 붙잡고 연주하니까 그의 생이 달라졌습니다.
여러분, 우리 손에 들려 있는 것, 그것이 비록 작고 보잘 것이 없다 하더라도, 혹은 나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에 이것이 없으면 안 될 것 같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손에 들려지면, 우리를 가장 잘 아시고 최고의 인생 연출가이신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가꾸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습니다. 무너질 수 있습니다.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취할 모습은 아닙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은 변함없이 여전하십니다. “사람들은 버려도 나는 버리지 않아, 넌 나의 여전히 귀한 존재야.” 자신의 손에 들려진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 부름 앞에 자신의 실패를 드릴 때, 우리는 더 이상 실패자가 아닙니다. 한해의 절반을 보내고 남은 후반기를 시작하는 7월입니다.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물어보시는 주님의 질문을 생각하며 짧게는 금년 한 해와 지나온 삶을 돌아보십시오. 고달픔과 깨어진 꿈의 상징이었던 지팡이가 본문 20절에는 ‘하나님의 지팡이’로 표현되고 있음을 기억하며, 좌절하여 의미 없이 살아가는 그 삶이 하나님의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인생을 누가 연주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주께 내 드리십시오. 우리 삶의 새로운 주인 되신 하나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주의 뜻대로 행하겠다고 드리는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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