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감사의 샘물이 흘러넘쳐야 합니다.⑤ 살전 5장16-18절. 2014년 6월29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6-30 |
조회: 1682
옥스퍼드 대학의 맥그래스 교수가 쓴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책에 보면 인생을 묘사한 한 구절이 참으로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그는 “짧고 상쾌한 산책일 줄 알았던 것이 미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마라톤으로 바뀐다.” 어린 시절, 철이 없을 때는 인생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걷는 산책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좀 더 걷다 보면 미처 준비가 안 된 채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되어 버립니다. 이 마라톤을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쳐 쓰러지고 탈락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는 인생길입니다.
2014년도가 엊그제 시작을 한 것 같았는데 벌써 한 해의 절반을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희망을 안고 살아온 한해가 올해는 반년된 이 시점에서 보면 얼마나 많은 사고와 사건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세월호 참사, 정치의 혼란, 그리고 한 병사의 총기 난사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사건과 사고의 여파는 어느 개인, 어느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이로 인해 사회 전반적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다보니 사람들이 마음이 불안해지고 메말라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문제 앞에 우리 성도들도 답답한 현실을 바라보는 게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머물고 사는 인생이지만, 이 땅에 메인 자들이 아닙니다. 고난이 있고 어려움이 있는 것 사실이지만, 저 먹구름 뒤에 여전히 친란한 태양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믿음의 끈을 동여메고 후반을 준비하는 운동장의 선수처럼 지금 내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에 보게 되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환난의 한복판에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에는 환난이나 고난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자주 등장합니다. 1:6에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 많은 환난 속에 있었다. 2:2에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2:14에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3:7에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특히 2절 상반절에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3:9절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노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도대체 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았기에 바울은 이렇게 감격에 찬 모습으로 감사를 고백하고 있나요? 사실 바울에게 있어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항상 빚진 마음을 가진 교회입니다. 행17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2차 선교여행 시에 약 3주 동안 머물면서 세운 교회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3주 동안 성경말씀을 가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그 결과 고위층의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릅니다. 정말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을 시기하는 유대인들이 이 데살로니아 지역까지 와서 엄청난 방해를 합니다. 그들은 불량배를 동원하여 야손에 집에 있던 바울 일행을 끌어내려고 침입을 합니다.
바울 일행을 찾지 못하자 야손과 형제들을 끌고가서 소리를 칩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에 왔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은 로마의 식민지 상태입니다. 로마의 황제는 곧 세상을 통치하고 지배하는 절대적인 신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바울 일행이 로마의 황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 즉 왕이 되심을 선포합니다.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반역을 도모하는 자들로 여겨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말을 들은 그 지역의 무리와 유지들이 소동을 일으킵니다. 결국 바울 일행은 야반도주를 하여 뵈뢰아로 갑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황입니까? 불과 3주의 짧은 기간 동안 제대로 증거도 못한 채, 마치 광야로 피신한 만삭이 된 여인이 아이를 낳고 탯줄을 짜르고 아이를 광야에 내두고 간 그런 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식을 들은 것입니다. 불량배까지 동원하여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극심한 핍박을 했던 데살로니가에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넘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무 기뻐서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을 기억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멘했습니다. 그리고 주를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데살로니가 교회 가운데 여전히 극심한 핍박과 환난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 일행이 핍박을 받았던 것처럼 유대인들에 의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극심한 환난 가운데 고통받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이처럼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 직면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오늘 바울이 결론적으로 한 말씀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바울은 지금 핍박과 박해 속에서 죽어가는 그들을 보면서 직접적인 위로와 소망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만약 여러분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었다면 오늘 바울의 권면이 야속하게 들리지 않았을까요? 지금 자기들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하고, 지키고 있는데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니 말이 되는 것입니까? 주님 오실 때까지 거룩하고 흠이 없는 모습으로 보전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파키스탄에서 차량 폭탄테러로 70명이 죽었습니다. 테러범들이 교회 안에서 예배 중인 자들을 죽이려고 차량에 폭탄을 싣고 교회 안에서 폭발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자들에게 기뻐하세요. 계속 기도하세요. 그래도 감사하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을까요? 이런 상황이라면 임마누엘 하시는 주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들을 잡아 옥에 가두든지, 지옥으로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계속 침묵하고 계신데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해야 할까요? 만약 여러분의 자녀들이 수 년 동안 수능시험을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정답 표시를 잘못해서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여러분 자녀에게 범사에 감사하자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내가 힘을 다해 노력했던 직장에서 억울하게 갑자기 사표를 쓰게 됐습니다.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된 남편에게 ‘여보 우리 그래도 감사해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내가 지금 전세금을 올려달라고 하는데 당장 은행에서 융자를 받을 수도 없고, 막막할 때 그래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내 건강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내렸을 때, 갑작스런 사고를 당했을 때...그때도 범사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저 자신도 범사에 감사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선언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이유는 감사는 하나님께로 나가는 (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100:4절에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육신이 병들었을 때 명의를 만나면 기쁘고 힘이 납니다. 내 인생의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인생의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안심이 됩니다. 내가 마음의 아픔과 상처로 지쳐있을 때 조용히 다가와 손 내밀어 주는 친구가 곁에 있어도 힘이 납니다. 다윗은 누구보다도 인생의 수많은 위기와 아픔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남도 아닌 장인어른인 사울 왕으로부터 억울하게 쫓겼습니다. 그것도 무려 10년이 넘도록 말입니다. 인생 말년에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맨발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기도 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이방 나라에 가서 침을 흘리며 미친 사람 행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원수들로부터 둘러쌓여 진퇴양난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이런 인생의 모든 닫힌 문을 활짝여는 마스터 키를 발견합니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것처럼 다윗은 찬양하며 노래합니다. 그 마스터 키는 바로 감사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는 문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기르시고, 주의 백성 삼으신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그의 궁정으로 초대하십니다. 감사하는 자만이 천국의 잔치에 초대를 받습니다. 감사는 자만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문으로 들어갑니다. 반대로 원망하고 불평하는 자는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은 오직 범사에 감사하는 자에게 열려진 문입니다. 감사의 문을 통과한 자들은 주님과 함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드리는 축복의 삶을 살게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원망과 불평의 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감사의 문을 선택했습니다. 비록 예수님 때문에 환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그들은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견고하게 일어섰습니다. 서로 사랑의 수고를 통해 돌아보고,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다시 오실 부활의 주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소망의 가지고 인내했습니다. 그 결과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주님을 본 받는 소문난 그리스도인들이 됐습니다.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떠올리며 감사하는 자들이 됐습니다. 감사는 선택입니다. 내 앞에 어떤 인생의 메뉴판이 있습니까? 원망과 불평의 렌즈로 바라보면 모두 비판거리요, 슬픔과 탄식 뿐입니다. 그러나 감사의 렌즈로 들여다보면 기쁨이 있고, 찬양이 있고, 은혜가 넘칩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바로 감사의 렌즈가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일지라도 범사에 감사하기로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감사의 렌즈를 끼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궁정으로 들어가는 문이요, 이 땅에서 주님이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감사하기로 결단하면 그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게 됩니다. 하나님이 곁에서 도와주십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불신자들은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재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럼에도 감사합니다. 그대로 감사합니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여기까지 지켜주시고 보호해 주신 하나님, 앞으로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기에 감사합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도전을 받습니다. 위로를 받습니다. 소망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1704년 독일의 베냐민 슈몰크 목사님 내외분이 심방을 갔다 집에 와 보니 집이 모두 불타버렸습니다. 어린 형제
가 집에 있었는데 불러 보았지만 대답이 없습니다. 혹시 하고 잿더미를 들추어보니 어린 두 형제가 부둥켜안은 채 죽어 있었습니다. 그 두 어린 아들의 시신을 앞에 놓고 망연자실 했습니다. 그때 별생각이 스쳐갔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순간 분노와 서운함과 의문이 몰려 왔습니다. 인간적인 오기도 서려왔습니다. 그런 생각에 휩싸여지자 온 몸에 소름이 끼쳐 왔습니다. 그 순간 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갔습니다. “여기에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에 평온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영감이 넘쳐 나왔습니다. 그때 주어지는 감동의 영감을 글로 적어 놓았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온 영혼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사 뜻대로 하소서“ 여기에 홀부르크라는 분이 곡을 붙였는데 그 것이 오늘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549장 찬송입니다.
행복이나 기쁨이나 감사함의 삶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환경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원망 불평할 수 있지만 그 속에 다가오셔서 손 내미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위로의 손길을 터치하는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핍박과 환난이 여전히 계속되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하여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라고 강조하셨을까요? 감사의 문을 통과하는 자만이 주님의 잔치를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감사의 문을 통과한 자에게만 주시는 놀라운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난의 물결이 끝도 없이 밀려오는 절망의 환경 속에서도 신앙의 향기를 뿜어대며 당시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여 주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바울은 너무도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3:9절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노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 여기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고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저들의 모습, 더 나아가 천국에 소망을 두며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소망의 인내, 이것은 충격 그자체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로는 다 담아 낼 수 없는 고백- 어떠한 감사로 보답할꼬?
이제 우리 교회는 전반기를 살아왔습니다. 1-6월까지 우리들이 살아온 모습을 보면, 사회적으로 대형 사고와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깊은 상처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나타난 현상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너무 메말라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비판과 정죄가 난무하는 시대입니다. 좋은 것, 옳은 것도 자기 관점에서 해석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진리를 들어도 변할려고 하질 않습니다. - 성경에도 말세가 되면 감사하는 삶의 모습이 사라지는 비극을 맞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를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때 교회적으로 우리 역시 다시한번 남은 후반기를 어떻게 보내야하는가를 고민을 해야 할 때입니다. 무엇보다 다음 주는 맥추 감사주일입니다. 6개월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드리는 맥추감사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맥추감사절의 의미와 어떻게 우리가 감사의 맥추절을 지켜야 하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모세의 인도로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 산 위로 부르신 후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3대 명절을 말씀하십니다. 유월절과 맥추절과 수장절입니다. 유월절은 애굽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드리는 절기입니다. 수장절은 일년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모든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감사드리는 오늘날의 추수감사절입니다. 그리고 유월절과 수장절 사이에 하나님은 맥추절을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이렇게 1년에 3번의 추수가 있었는데, 여기에 맞춰 큰 명절 3가지를 제정하셔서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절을 지킬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신 은혜들을 회상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리도록 한 것입니다. 이렇게 매년 몇 개월에 한 번씩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기뻐하다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연히 감사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그 감사가 체질화되고 생활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긴 역사를 살펴보면 정말 불행하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이 3절기를 제대로 지킨 적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귀찮다는 이유로 절기가 있다라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수백 년을 보낸 암흑기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때를 따라 적절한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이야기해 줍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전철를 밟는 불행한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감사가 우리에게 체질화되고 습관화 되도록 계속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연습해야 될 것입니다.
어느 성도의 고백처럼 "나는 장미를 들고는 수백 번 감사를 했지만 가시를 가지고 감사한 일은 한번도 없었습니다."라는 말은 솔직한 고백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감사는 온전한 감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장미를 놓고 감사해야 되지만, 가시를 놓고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면서 가시를 가지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장미와 가시를 동시에 놓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평생 장미만 들고 인생을 화려하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도 예외 없이 가시 때문에 찔리고 고통하는 일들이 가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도 예외 없이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지나온 반년을 돌이켜 보면 지금까지 지켜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기쁜 일도 있고,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영광 돌리시기를 원합니다. 18세기 영국의 시인 조지 허버트가 이런 아름다운 기도시를 남겼습니다."하나님! 당신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이제 한 가지만 더 주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을!" 이 은혜가 여러분 위에 항상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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