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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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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바나바가 필요합니다.④ 행4:36-37절. 2014년 6월22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6-22 | 조회: 1679
어제 신문에 보니까 시대별로 같은 이름을 선호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50년대, 60년대는 명숙, 정숙, 경숙, 민숙, 은숙, 영희, 은희 ... 요즘에 많이 짓는 이름은 민서, 서희라는 이름이 압도적으로 많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도 보면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름은 누구에게나 아주 소중합니다. 이름은 단순히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인상과 성격, 인품을 보여줍니다. 사실 이름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주어지는 최초의 선물일 뿐 아니라,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결단코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잘 짓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 신문에 보면 성경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나쁜 짓을 해서 오르내리는 것을 봅니다. 평생 자기 이름이 불려 질 때마다 자신의 무의식 속에 이름에 대한 책임감을 가집니다. 우리는 자기 이름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합니다.

그런데 과학문명이 발전되면서 점점 사람의 이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이 다른 사람들에게 의해 불려 지지 않습니다. 번호로 대신합니다. 그래서 번호인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요즘은 어느 곳에 가든지 번호표가 있습니다. 은행에 가보아도 공공 기관에 업무를 보더래도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아니라 “몇 번 손님”으로 불려 집니다. 번호가 아닌 이름을 불러 줄때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 인격적인 존재, 꽃과 같이 아름다운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을 보면 이름보다 별명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 나옵니다. 그의 별명이 얼마나 멋있었는지 이름보다 별명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36절을 보세요.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하니” 그의 이름은 ‘요셉’이었어요. 바나바는 사도들이 그에게 붙여준 별명인데, 그것이 너무 유명해져서 우리는 그를 요셉이라 하지 않고, 오히려 바나바라 알고 있는 겁니다.

'바나바'는 여기에는 위로의 아들로 번역을 했지만, 전에 보던 개역한글에는 권위자라고 번역해 놓았어요. 그렇다면 권위자는 무슨 뜻일까요? 勸(권할 권), 慰(위로할 위), 子(자식 자)를 썼어요. '격려의 아들'‘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격려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얻었는가? 본문을 보면, 요셉은 구브로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자기 고향인 팔레스타인에서 자란 유대인이 아닌 외국에 거주하는 유대인이었어요. 레위족이었지만 제사장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니요, 사도도 아니요, 보통 레위인, 즉 우리와 같은 평신도에 지나지 않았어요. 그러나 사도행전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바나바는 초대교회에서 사도 바울에 버금가는 중요한 지도자의 위치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이 평범한 이 사람을 위대한 바나바로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바나바를 그토록 위대한 지도자로 세웠습니까? 사도행전은 그가 행하였던 격려의 삶으로 인해, 그가 이러한 위대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얘기합니다. 그가 살았던 격려의 삶이 너무나도 놀라웠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를 원래 이름보다는 '격려자'라는 별명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바나바의 별명을 가진 자들이 필요합니다. 특히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나를 믿어주신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 앞에 격려자가 될 수 있다면, 그 한사람으로 인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줄 믿습니다. 오늘 저는 교회 - 바나바가 필요합니다. 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Ⅰ. 오늘 본문에 보면 바나바는 사람을 세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바울이 바울로 하나님 앞에 정말 멋지게 쓰임을 받았던 것은 바나바의 손길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바나바가 없는 사도 바울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약 성경을 제일 먼저 기록한 말씀이 마태복음이 아닙니다. 마가복음입니다. 이 마가를 마가답게 세웠던 사람 역시 바나바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을 세운다는 것은 믿음과 배려가 없으면 안 됩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37절)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줌이러라”(34-35절) 아마 예루살렘에 있던 수많은 성도들은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헌금을 했던 것 같습니다. 구제헌금이겠지요. 그런데 왜 유독 바나바만 기록되었을까요? 아마도 다른 모든 성도들이 구제헌금에 동참했지만, 바나바가 가장 대표적으로, 가장 성실하게, 가장 모본(模本)이 될 만큼 깊게 구제 사역에 봉사했기 때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굉장한 부흥을 맛보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교인이 몰려들었어요. 교회가 성장한다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교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많은 교인들이 한꺼번에 들어오다 보니 많은 필요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그 당시 역사나 사도행전에 나타난 예루살렘 교회는 참으로 가난한 교회였습니다. 아니,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로마의 속박에서 수많은 세월을 눌려 지내왔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겁니다. 당장 교회 안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교회가 어떻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가 였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보면, 구제에 대한 문제가 교회 안에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이 교회의 필요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소유의 밭을 팔기 시작했어요. 그 밭을 판돈을 전부 교회 앞에 내놓았다고 말씀합니다. 바나바가 자기의 밭을 내놓은 이유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공명심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에게 필요가 없어서 넉넉한 가운데 바친 것도 아니었어요. 그가 자기의 소유를 판 단 하나의 이유는 가난한 자들에게 조금이라도 격려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주 어려울 때 정말 사랑의 돈 얼마를 받아보셨습니까? 혹은 줘 보셨나요? 저는 지금도 기억합니다. 참으로 어렵게 신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 어느 날 등록 기간이 다 되어갈 때 누구인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제 등록금을 어느 분이 학교에 와서 납입을 해 준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단순히 등록을 했다는 안도감보다는 그 손길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를 이길로 보내셨다는 소명의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바로 이것을 알았습니다. 밭을 팔아 내어놓는다고 수많은 교인들에게 무슨 큰 경제적인 보탬이 되겠습니까마는, 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자기의 밭을 과감하게 팔았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바나바라고 해서 왜 돈이 필요 없고, 쓸 곳이 없었겠습니까? 그에게도 가족이 있었어요. 누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취미생활도 하고 싶고, 저축도 해야 되고, 쓸 곳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전에 먼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바나바'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한두 번이 아니었을 겁니다. 늘 다른 사람의 필요를, 늘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했던 배려의 사람입니다. 이렇듯 격려의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바라봅니다.

"목사님, 사람을 舅마遮臼 차라리 우리 집 개를 믿지요!"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왜 개를 좋아하는지 아세요? 개는 배신을 안 합니다. 오히려 사람이 복날에 개를 배신하지요. 사람은 우리를 배신합니다. 제가 전도사로 있었을 때 여전도회 회장님이 계를 했어요. 여전도회 회원을 다 모아서 계를 했는데, 회장이 우두머리를 하다가 계돈을 다 모아서 떠나 버렸어요. 그 교회 계판이 개판이 되고 말았지요. 난리가 났어요. 눈만 감으면 코 베어 가는 세상이 아닙니까? 어떻게 사람들을 믿을 수 있어요? 그러나 바나바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격려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사람을 믿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사울이라는 젊은 청년이 예수 믿는 사람을 감옥에 가두기 위해 다메섹으로 갑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하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켜서 그들을 잡아다가 족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어요. 그 날도 다메섹으로 가고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어요.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그 이후, 사도 바울은 변했습니다.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가서 성도들과 교제하고, 복음을 나누며 전하고 싶은데, 누구 하나 자기를 믿어주지 않는 겁니다. 워낙 사울이 악하게 굴었기 때문에 다들 믿지 않았어요. "아마 저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서 예수 믿는 사람 누구누구를 끌고 가려나 보다! 스파이가 아닐까!" 하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사울이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그때 놀라운 사람이 한 사람 등장하는데, 그가 말합니다. 사도행전 9장 26,27절을 보세요.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바나바가 어떻게 주님 본 것을 압니까? 그는 그 자리에 같이 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사울 대신에 바나바가, 사울이 예수님 만난 것과 영접한 것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얘기해 주는 겁니다. 바나바가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왜 이렇게 알 수 있었을까요? 바나바는 사울을 믿은 줄 믿습니다. 사울을 믿어준 겁니다. 그가 자기에게 와서 간증을 하는데 믿어주고 싶었던 겁니다. 도와주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를 믿고, 사울이 아무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얘기를 해도 믿지 않으니까 자기가 대신 나가서 얘기를 해 준 겁니다. 바나바의 인격을 아니까 그제야 성도들이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누가 고마우십니까? 저는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참 고맙더라고요. 아내가 저에게 무엇을 할 때 가장 고마운가? 요리, 안마, 이런 것보다 몇 백 배 더 고마운 것은 저를 믿어주는 겁니다. 제가 참 믿지 못할 사람인데 너무나 믿어줍니다. "당신은 목회 잘 할 수 있어. 당신은 훌륭한 목사가 될 수 있어!" 라고 믿어줍니다.

어떤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자랍니까? 믿어주는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식이 자라납니다. 가만히 관찰해보면 지식이 많은 부모, 훌륭한 부모 밑에서 훌륭한 아들이 계속해서 나오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이 많으면 의심을 많이 하기 때문입니다. 옛날 시골의 부모님들은 농촌에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공부가 뭔지도 모르고 아들을 유학 보냅니다. 아들이 가끔 거짓말을 합니다. "등록금이 필요합니다." "책을 사야 합니다. 쌀을 팔아 부치세요."

그 돈을 받아 아들은 술을 마십니다. 그런데 시골의 부모는 전혀 모르니까 공부하는데 이렇게 돈이 드는 줄 알고 쌀 팔고, 밭 팔아서 도와줍니다. 거짓말도 한두 번이지, 어머니의 지성으로 계속 오는 쌀을 어떻게 견 수 있습니까? 그러다가 자신이 회개합니다. 훌륭한 사람이 나와요. 언제나 자식을 CIA의 눈초리로 감시하고, 학교에서 어떻게 하는지 스파이까지 보내고, 그렇게 하지 마세요. 우리는 다른 사람을 믿어주어야 할 줄 믿습니다.

얼마만큼 믿어주어야 합니까?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하루에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잘못하는 것을 몇 번까지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 잘못하고 일곱 번 찾아와서 잘못했다고 해도 그 사람을 믿고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너무나 사람을 믿어주지 않습니다. 내가 변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내가 회개했다고 해도 믿어주지 않아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한번 붙은 딱지를 떼려고 하면 10년이 걸린답니다. 10년 동안 못 참아서 "이왕에 나를 의심하는데 니 소원대로 한번 살아주마!" 그러면서 남편과 자녀가 뛰쳐나갑니다. 알고도 속아주는 게 필요합니다.

알고 속아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은 줄 아십니까? 모르고 속으면 내가 바보가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쁩니다. 그런데 알고 속아 주면 기쁩니다. 다른 사람을 믿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래야 그 사람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어제까지 망나니 같이 생활하다가 오늘 올바로 생활하겠다고 하면 믿어주십시오. 격려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Ⅱ. 교회가 바나바가 필요한 것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신앙 때문입니다. 행11:에는 바나바의 또 다른 아름다운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목회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나바가 부임한 그 날부터 안디옥교회는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바야흐로 바나바의 인기는 최고였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일을 바나바가 혼자 감당하기 어렵자 그는 바울을 초청하여 함께 동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바나바가 옹졸한 목회자였다면 바울을 데리고 오는 것을 꺼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인기나 명예, 성취욕보다도 하나님의 일이 더욱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을 불렀고 그가 오자마자 교회는 더욱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나바의 판단은 신중했습니다. 바나바의 천거로 사울은 바울이 되었고 바울은 바울되기 위한 일터의 현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있었기에 비로소 안디옥 교회는 세계선교의 센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행11장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표기가 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장 이전에는 "바나바와 사울이"라고 기록되었지만 이일 후에는 "바울과 바나바가"로 표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세계선교의 주체가 바나바에서 바울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바나바의 불평이나 원망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그는 침묵으로 기쁘게 서서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기의 뒤를 이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 감당하는 이것이 전혀 섭섭하지 않았던 이 사람,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의 인기, 체면 ,목표보다도 주님의 사역이 더욱 활발하기를 원했던 바나바, 여러분은 이 사람이 그립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될 수 있다면, 주의 교회가 좀더 부흥될 수 있다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주를 섬기리라"고 살았던 사람 바나바, 자기 의나 체면이 세워지는 것, 그것은 그의 일차적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것, 역시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로 지 주의 일이 부흥되기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승리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했던 사람,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받기 원했던 사람, 그리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로 성숙하기를 원했던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라면 자기는 조용히 사라져도 좋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사람이 그립지 않으십니까? 어쩌면 오늘의 동성교회가 더욱 필요로 하고 있는 인물이 있다면 바울보다는 아마도 바나바 일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한번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격려의 삶이 필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넘어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도 넘어진 자였습니다. 모세도 쓰임 받기 전에 넘어졌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넘어진 경험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성경은 우리 모두가 다 허물이 많았던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는 격려가 필요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성령 하나님을 보내시고 별명을 붙여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별명은 '보혜사'였습니다. 파라클레토스! 직역하면 '옆에 서서 돕는 자'입니다. 오늘 말로 번역하면 '우리를 격려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성령 하나님을 왜 보내셨는가? 우리는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실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고 우리가 낙심하는 것을 방지하고,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님을 보내신 줄 믿습니다.

바로 그 은혜 앞에 살아가는 자가 여기 모인 여러분과 저입니다. 주께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여 주지 않았다면, 내가 어떻게 이 사랑, 이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말 구원받을 수 없는 죄로 말미암아 허무와 저주 가운데 죽어갈 영원히 멸망할 우리 자신들을 주님은 자신의 아들 독생자를 죽여서까지라도 구원하시고 사랑하신 은혜의 열매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볼 때, 내가 너를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따라서 아들까지 죽이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보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 어머니 기도회에 오셔서 큰 은혜를 끼친 위기상담 전문가이신 정태기 교수님께서 쓰신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책에 보면, 정 교수님께서 한 때 심각한 신앙의 위기를 당할 때에 소록도에 갔던 경험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정 목사님은 기도가 목구멍으로 넘어오지 않고, 알 수 없는 분노 때문에 고민을 하다가, 소록도에 무작정 들어갔습니다. 그가 소록도에 도착하던 날은 마침 수요일이었고, 예배당에 가보니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통성기도가 시작되었는데, 목사님은 아무리 애를 써도 기도가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기도가 목사님의 귀를 파고들었습니다. 그 기도소리는 머리를 치고 가슴속을 후벼 파는 소리였습니다. “하나님, 제게 주신 은혜가 어찌 이리 큽니까? 주님, 어찌하면 제가 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습니까?”

기도소리는 계속되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이 큰 은혜에 제가 어찌하면 만 분의 일이라고 갚을 수 있겠습니까?” 정 목사님은 그 기도소리를 듣다가 도대체 무슨 은혜를 그렇게도 많이 받았기에 저런 기도를 할 수 있는가 싶어,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60이 넘은 듯한 흉측하기 이를 데 없는 늙은 노인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한센병이 얼마나 심했던지 얼굴의 형태를 거의 알아볼 수 없는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는 머리, 떨어져 나가 움푹 패인 코, 짓무르다 못해 위아래가 붙어 버린 눈...그 눈으로 그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손목뿐인 손바닥으로 박수를 쳐가면서 목이 터져라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정목사님은 자신의 가슴 속에 뜨거운 것이 울컥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곧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피처럼 붉은 통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두 시간이나 정목사님은 그렇게 통곡을 하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가 끝난 뒤에 그 노인이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정 목사님은 그 분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뭐가 그렇게 고마우세요? 무슨 은혜가 그렇게 크신 것입니까?” 그 때 그 노인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문둥병에 걸리자 세상도, 피붙이들도 다 나를 버렸어. 물론 친구들도 다 떠나버렸지. 그런데 말이야, 이 소록도까지 나를 따라온 분이 계셨어. 그리고 내게 소망과 기쁨을 주셨지” “아, 할머니가 따라 오셨군요?” “아니야, 할머니는....예수님이 따라 오신거야!” (침묵)

그렇습니다. 우리 역시 이 은혜를 덧입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교회와 가정, 그리고 여러분의 삶의 현장에 위로자, 격려자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요즘 정치나 월드컵을 보면 사람들이 너무 잔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사람을 세워놓고 그들이 쌓은 한 생을 단 며칠 만에 무너뜨리는 무서운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의 사람 밑에서 자랐습니까? 최근에 누군가로부터 따뜻한 위로를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배우자, 자녀, 부모, 직장 동료, 그 누구든 간에 정말로 용기를 심어주는 따뜻한 격려를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여러분은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비판과 정죄가 난무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신문을 펴면 온통 비판의 글들이 가득합니다. 학생들은 교사를 비판하고, 고용인과 고용주들은 서로의 잘못을 비판합니다. 국민들은 지도자를 비난하고, 지도자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급급한 세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이 참으로 없는 세상입니다. 사람과 이 사회를 세우는 격려의 사람은 더욱 찾아보기가 어려운 세대입니다. 누가 이 척박한 세상을 위로해 줄 수 있겠습니까? 누가 정죄의 화살을 맞고 남몰래 신음하는 자들을 찾아가 치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오늘의 세상은 바나바를 찾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바나바를 소리쳐 요구하고 있습니다. 누가 바나바가 되어 낙심하여 멸망해 가며, 격려가 필요해서 아우성치는 저 사람들의 소원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오늘 당신이 이 사람이 되어 보지 않겠습니까? 바나바와 같이 남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남을 믿어 주며, 사람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목적으로 생각하며, 넘어진 자를 과감하게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자!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가정과 교회, 불신과 낙담으로 인해 넘어져 가는 이 한국 사회가 다시 일어날 줄 믿습니다. 지금은 바나바가 그리운 시대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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