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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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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 우리의 등대지기입니다. 요13:1-7. 2014년 5월 18일 주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5-18 | 조회: 1408
“권한이 커지면 책임도 그만큼 커진다." 어떤 조직이나 공동체에서 리더가 되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리더가 권한만 챙기고 책임에는 눈감으면, 그 조직이나 공동체는 죽은 거나 마찬가집니다. 배에서 선장은 최고의 리더이고, 비상시에는 전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선장에게 그런 권한을 준 건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월호의 선장과 승무원들은 침몰하는 배에서 먼저 탈출하다시피 해서 살았습니다. 그 순간에도 단원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은 선내 방송대로 동요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습니다. 배에서 탈출하겠다고 다툼을 벌이지 않고 자리를 지키건, 선장을 믿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그들은 대부분 숨지거나 실종된 상탭니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은 이번 일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진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번 세월호 사고는 희생자 가족은 물론 대다수 국민들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줬습니다. 상처를 치유하려면, 제대로 따져봐야 합니다. 큰 일이 벌어지면 처음에는 흥분했다가 조금 뒤엔 용서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시간의 흐름 속에 아픈 기억을 묻어두는 행태를 이번에도 반복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 사건을 통해 깊이 생각을 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권한이 커지면 책임도 그만큼 커진다." 는 것입니다. 어느 공동체든지 지도자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가 갈립니다. 심지어는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까지 좌우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와의 만남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교회는 스승의 주일로 섬기고 있습니다. 교회도 그동안 수고한 교회학교 교사분들의 그 수고와 희생, 그리고 헌신을 어떻게 다 위로해 드려야 할지 늘 죄송스러운 마음이 많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다 동의 하시지 않습니까? 스승의 가르침 없이 성장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과거에는 '스승'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존경심이 우러났습니다. 스승의 그림자는 감히 밟지도 않았잖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점점 스승이라는 말이 사라져 갈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고급 지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 정도로 알아가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3년을 동고동락하면서 이제 헤어져야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됩니다. 이때 주님이 보여주신 그 모습은 여기 있던 제자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주게 됩니다. 본문의 내용은 여러분이 다 잘 아시는 내용이 아닙니까? 이제 불과 몇 시간이 지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자신은 얼마 안 있으면 십자가의 달려 죽는 그 고통이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앞일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때 주님이 보여주신 그 모습은 여기 있던 제자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주게 됩니다.

이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교회학교를 섬기거나 또 실로암 실버대학, 그리고 목장을 섬기는 목장지기 모든 교사들이 가슴에 담아야 할 말씀입니다.




1. 여기서 스승으로서의 주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은 사랑을 먹고 살아야 할 존재임을 보여 줍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말은 “진정으로 사랑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제자들 가운데 누가 있습니까? 유다는 지금 예수를 배반하려는 계획을 다 짜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유다는 배신자입니다. 두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표리부동한 사람입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분노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손이 덜덜덜 떨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티를 내지 않고 유다의 발을 다른 제자들처럼 다 씻겨 주셨습니다.

그때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발을 척 내 맡기는 유다를 볼 때 속에서 치가 떨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나머지 제자들에게 눈치 채지 않게 초연하게 다 씻어주셨습니다. 주님은 마지막 시간까지 유다를 기다리셨습니다. 발을 씻겨 주셨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천연스럽게 행동하며 회개의 기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기를 파는 제자에게까지 진정한 사랑으로 대하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스승의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려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돈이나 명예나 건강이 아니라 사랑의 목마름입니다. 사랑에 주린 자들이 쓰라린 가슴을 부등켜안고 사랑을 갈망하고 있습니다. 학교교육이든 가정교육이든 신앙교육이든 가장 중요한 본질은 사랑입니다. 아무리 좋은 지식을 전하고, 좋은 환경을 제공해도 사랑이 없는 교육은 헛수고입니다. 오늘날 많은 부모가 있고, 스승이 있고, 영적 지도자들이 있지만 현실은 참 어둡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전4:15절에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통하여 자녀를 낳는 심정으로 제자를 양육했습니다. 교육의 위기는 바로 사랑의 부재입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는 모든 교육은 물 없는 오아시스와 같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아비의 심정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성경지식의 전달이 아닌 삶으로 가르치는 사랑의 교육입니다. 아비의 심정으로 우리가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사랑과 추억을 남겨야 합니다.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존파의 대부 김기환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집이 몹시 가난해서 미술시간에 크레파스조차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매번 크레파스를 가져오지 않는 기환이에게 담임선생님은 “도대체 이번이 몇 번째냐?”며 고함을 쳤습니다. 집안 형편을 말할 수 없어서 아무 말도 못하는 그에게 교사는 다시머리를 세게 쥐어박으며 말합니다. “다음부터는 훔쳐서라도 준비물을 가져와.” 친구들 앞에서 창피함을 당한 그는 이때부터 무엇이든지 필요할 때마다 도적질과 강도질을 반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7년 후에는 살인강도 죄로 사형을 언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초등학교 때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제 인생을 바꿔놓고 말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교회학교에 나오는 유치부에서부터 청년부까지 모든 자녀들을 정말 사랑으로 대해주세요. 좀 늦게 오더라도 따뜻하게 사랑으로 감싸주세요. 좀 떠들어도, 스마트폰으로 딴짓해도 기다려주세요. 머리를 칼라로 물들여도 이해하세요. “야 너를 보니 내장산 단풍구경갈 필요없구나! 정말 멋지다.” 칭찬해주세 그들 마음에 쌓여 있는 울분을 사랑으로 녹여주세요. 그리고 더 많이 격려해 주시고, 칭찬해 주세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자신감을 가지고 달려가게 합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칭찬과 격려, 그리고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2.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본을 보여주어야 합니다.스승이 어려운 것은 바로 말로가 아닌 삶으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예수님이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사랑하는 제자들을 불러 모으십니다. 저녁을 잡수신 후에 겉옷을 벗고, 수건으로 허리를 두르십니다. 대야에 물을 떠다가 삼년 동안 함께 했던 제자들의 더럽고 냄새나는 발을 하나씩 씻겨주십니다. 발을 모두 씻겨주신 후에 다시 교육을 시킵니다. 왜 내가 선생으로서 너희들의 발을 씻겨 주었는지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처럼 너희들도 그렇게 행하라고 본을 보여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사실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예수님은 누군가 자신의 제자 중에 발을 씻기는 섬김을 실천하는 모습을 기다리고 계신 것으로 보여 집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발 씻음은 샌들을 신고 다니던 시절, 더위가 심한 사막지대에서는 손님들에 대한 예절이어서 집 문 곁에 물동이와 대야를 준비했다가 귀한 손님이 도착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섬김의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제자도 이런 섬김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요한복음13:3은 “저녁 먹는 중에”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사실 발 씻음은 저녁 전에 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그때까지 제자들의 액숀을 기다리고 계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제자들 편에서 아무런 행동의 징후가 없자 본문이 시작되는 4절에 보면 그분은 마침내 저녁 드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아마 저녁 식사는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서둘러 자신의 식사를 끝내시고 이 소중한 기회를 섬김을 가르치는 기회로 사용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실천 후에 주님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시지 않으셨습니까? 요13:14-15절에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이유는 바로 본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미리 보여주시고, 너희가 나를 따르는 제자가 되려면 너희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본'(example)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본의 극치는 섬김입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으로서 받으실 수 있는 대접을 포기하셨습니다. 대신 가장 낮은 사람인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때로는 오해를 때로는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기꺼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섬기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의 제자되기를 구하는 오늘의 여러분과 저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기꺼이 자신을 낮추기 위해 주장할수 있는 특권을 포기해 본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이웃들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신 것들이 있으신가요? 자신을 위해 쓰는 일을 줄이고 이웃들을 사랑하고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삶이 있으셨나요? 좀 더 큰집에서 살수 있는 분들이 집을 줄인다든지 좀 더 큰 자동차 탈수 있는 분들이 더 작은 차를 타며 이웃을 섬기는 일을 위해 살고자 하는 모습들이 있으셨는지요?

주차장에 주차 할때도 다른 이웃들이 주차하기 어렵지 않도록 주차하지 말아야 할 곳에 주차 안하고 내가 좀 더 먼 곳에 주차하고 걸어오는 일, 엘리베이터 탈 때나 식당에서 식사 할때도 연약한 이웃을 배려하고 자신이 손해볼줄 아는 것-믿음의 표현은 이런 구체적인 양보나 희생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챙길 것 다 챙기고 다 대접받고 다 높임받고 언제 섬기고 언제 이웃들을 전도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섬김의 시작은 자신의 비우심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섬김의 마지막 절정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자신을 죽음의 자리에 두신 것입니다.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동맹 휴학을 벌였습니다. 체벌 교사의 처벌 요구했는데 학교 당국이 이를 거절하고 주동 학생들을 징계하려고 해서 수업을 거부한 것입니다. 운동장에 모였다던 학생들이 교무실로 우르르 몰려갑니다. 교사들은 슬슬 피해버립니다. 그런데 유독 나이 지긋한 선생님만 남아서 학생들을 만나 호통을 칩니다. ?야! 이놈들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 썩 나가지 못해!?

그러자 흥분한 학생 몇이 선생님을 구타합니다. 선생님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구타를 당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손으로 다른 데를 가리지 않고 끝끝내 눈만 가리고 있는 겁니다. 사태가 겨우 수습되자 학생들은 큰일 났다 싶어 그 선생님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빕니다. ‘죽을죄를 지었노라고.’ 그런데 선생님은 웃으면서 ‘잘못을 뉘우쳤으니 괜찮다’며 격려합니다. 그러자 안심이 된 학생 들 중에 하나가 질문합니다. ?그런데 선생님, 왜 눈을 가리 계셨어요??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거? 나를 때리는 학생을 보고 싶지 않아서... 나도 인간인지라 두고두고 나쁜 감정을 품게 될까봐 그랬지.?그 말씀을 들은 학생들은 그만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런 사랑의 가슴을 가진 교사에게 배운 학생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예수님의 섬김을 받던 12제자들 가운데 11명의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닮는 섬김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 속에서 거룩한 주의 향기를 온 땅에 펼쳐 보입니다.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James)는 유대의 총독으로 임명된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목베임을 당했습니다. 빌립(Philip)은 북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A.D. 54년에 십자가에서 처형됐습니다. 마태는 아프리카 에디오피아에서 사역하다가 A.D. 60년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일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베드로의 형제 안드레(Andrew)는 십자가 못박혀 죽었습니다.

마가(Mark)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몸이 찢겨서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Peter)는 십자가에서 거꾸로 못박혀 죽었습니다. 야고보의 형제 다대오(Thaddeus) A.D.72년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바돌로매(Batholomew) 역시 폭행을 당한 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창에 찔려 죽었습니다. 가롯유다 대신 뽑힌 맛디아(Matthias)는 예루살렘에서 돌매질을 당하고,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요한(John)은 기름이 끓는 가마솥에 던져지는 형을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달아났습니다. 그 후 도미티안 황제에게 붙잡혀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가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고 유일하게 순교를 당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교회를 지키는 산 순교자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교사, 그리고 성도 여러분!

저는 세월호 침몰 참사에 대해 모두를 시작을 했습니다. 오늘 이 사건이 주는 이 시대에 주의 음성은 무엇일까? 아마 여기 계신 여러분은 이 문제로 고민을 안 해 보신 분이 없을 것입니다. 저는 배가 노후화가 되었다, 과적이다 이것을 떠나서 그 현장에 있었던 책임자들의 자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배를 총 책임하는 선장은 그 누가 뭐래도 배와 함께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고 당시 팬티바람에 정말 부끄러운 모습으로 배를 버리고 나와 구명정에 올라탔습니다. 또 한사람은 수학여행을 인솔한 교감 선생입니다. 그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자살로 아까운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문제가 있습니다만, 저는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우리의 자세를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권한이 커지면 책임도 그만큼 커진다."

그러므로 스승의 자리는 자기희생의 과정이 없이는 그 제자들이 바로 설 수 없기에 야고보도 약3;1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선생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생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야기입니다. 교사는, 스승은 단지 강단에서 잘 포장된 지식 보따리를 풀어 장사하는 고급 기술자들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사명감을 가지고 사람세우는 수고의 그 가치를 알고 감당한다면, 이 스승처럼 보람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아픔을 터뜨린 적이 있습니다. 스승의 자리는 외롭고 힘든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러나 그 수고에는 값진 열매가 따라 옵니다.

오늘 이 시대는 분명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도, 정의도 거대한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채 방황하는 한 복판에서 그래도 우리에게 필요한 분은 스승들이십니다. 삯꾼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양 떼를 위하여 생명을 거는 일이 없지만 선한 목자는 언제나 그 일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생명을 걸고 해산의 수고를 합니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의 가치는 양 떼들이 생명을 보존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의 몸을 저주의 형틀에 맡기셨습니다. 살이 떨어져 나가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저주하고 배반했던 제자들을 향해 오히려 용서를 선포하십니다. 위대한 스승은 실수와 허물을 사랑으로 덮어줍니다. 끝까지 참아주고, 기다려줍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사랑이요 부모님의 사랑입니다. 또한 신앙의 스승들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교회학교 아이들을 위해서 수고하시는 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 현장에서 가르치는 교사들도 있습니다. 목장에서 수고하시는 목장지기와 교회의 어르신들인 장로님들과 권사님, 안수집사님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사랑의 수고와 노력을 기억하고 더 많은 격려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한 스승의 헌신된 사랑이 한 개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공동체와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고 교사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존경받는 영적 스승을 찾고 계십니다. 인생의 방향을 가르쳐 주는 스승, 삶으로 본을 보여주는 스승, 그리고 눈물과 사랑으로 헌신하는 스승을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찾고 계십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찾는 영적 스승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을 통하여 자녀들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교회학교 교사들을 통하여 이 시대를 살리는 영향력 있는 주의 자녀들이 나올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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