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 - 내 인생의 자서전입니다. 잠23장 22-25절 2014년 5월 11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5-11 |
조회: 1723
5월의 푸르름이 더 해지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우리의 부모님입니다. 계절의 여왕이요, 꿈과 희망의 계절이며, 또한 가정의 달이기도 한 이 5월에 우리는 그 동안 효도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부모님을 생각할 때 가슴이 저려옵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부모님이 최근이나 일찍 돌아가셔서 효도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살아생전에 불효한 것, 마음 편하게 해드리지 못하고 속 썩여 드린 일만 생각이 날 것입니다, 또 부모님이 살아계신다 해도 이 세상의 생존경쟁 속에 바쁘게 사느라 제대로 효도하지 못하고, 또 삶 속에 다가오는 여러 가지 실패와 어려움 때문에 마음을 아프게 하고 걱정 끼쳐드린 것 등 잘 해드리지 못한 것만이 생각날 것입니다.
저 역시 불효자로 살았는데 우리 어머님 가신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이 되었습니다. 제 스마트폰에는 어머니의 마지막 임종 전에 요양원에 계실 때 사진을 갖고 있습니다. 건강할 때 자주 효도하지 못하고 치매로 자식을 자식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 말입니다. 그래도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말은 안해도 저의 마음을 다 아는 것 같아 그 사진 한 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2000년에 들어서면서 만 65세 이상의 인구 비중이 7,2%가 되어 정식으로 고령화 국가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작년 2010년에 들어서서는 소위 노령인구가 510만명으로 집계되어 총인구의 10%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노인들의 평균 수명 증가와 가임 여성들의 출산율 저하로 우리나라는 이제 전 세계에서 가장 급속한 속도로 인구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런 노령화 사회현상이 촉진되면서 이미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노인들의 사회 보장 문제가 최대의 사회 현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논의의 뒤안길에서 아직도 논의되기를 기피하고 있는 최대의 숨겨진 또 하나의 사회 현안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소위 노인 학대의 문제입니다. 어느 기관이 조사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의하면 전체 응답 노인의 8,2% 무려 10%에 가까운 노인들이 그들의 자녀 및 가족원으로부터 학대받고 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 5:8절에서“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 친족”은 일가친지를 가리키고, “자기 가족”은 직계 가족을 가리킵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기의 가족이나 친척들에게는 잘못해서 좋은 아버지, 좋은 어머니,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지 못하면서 이웃에게 잘하여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가리켜“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잠언서 말씀에 보면 자식들이 부모님께 크게 세 가지를 잘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부모님께 청종하는 자녀들이 되야 합니다.
청종(聽從)은 말 그대로 잘 듣고 순종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엡6:1절에도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자녀가 해야 할 일이요. 이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옳다는 것은 “원리에 맞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계에 기본 원리를 세우신 것처럼 인간 세계에 기본 원리를 세워 놓으셨습니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은 자연의 기본 원리에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여 희생하고 자식은 그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간 세계의 기본 원리에 맞습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은 옳은 일입니다.
왜 청개구리가 비만 오려고 하면 애달프게 울어 대는지 아십니까? 엄마가 무슨 말을 하든 거꾸로만 행하는 고약한 심보를 가진 새끼 청개구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엄마 청개구리가 죽게 되었습니다. 새끼의 나쁜 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엄마 청개구리는, 자기가 죽으면 물가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만사를 반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새끼니까 그렇게 유언을 해야 산에 묻어줄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가 죽자 그제서야 새끼 청개구리는 정신이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엄마에게 효도하기로 하고, 새끼는 엄마의 유언에 따라 물가에 묻었습니다. 그랬더니 비가 오면 냇물이 불어 엄마의 묘가 떠내려가려고 합니다. 뒤늦게 효도한답시고 물가에 엄마를 장사지낸 청개구리는 비만 오려고 하면 지금도 불안한 마음으로 애달프게 운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청개구리 같은 자녀는 없으신지요? 평상시에는 불순종하다가 돌아기시고 난 후에 철들면 이미 때는 늦은 것입니다.
둘째로, 부모님을 존중해야 합니다.
본문 22절 말씀에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라는 것은 가볍게 여기거나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공경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십계명 중 제5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여기 ‘공경하라'는 히브리어 ’k bad'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즉, ’공경한다'는 것은 ‘무게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신 부모님께는 우리가 도저히 흉내내거나 상상할 수 없는 삶의 무게, 경륜의 무게, 인식의 무게가 있는 법입니다. 바로 그 무게를 인정하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 무게를 인정하면 귀히 여기지 않을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무게'란 ’긍지'와 동의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 인생의 무게를 존중한다는 것은 자식으로써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품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요, 만약 이 긍지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부모님의 무게를 인정하기는커녕 깃털보다 더 가벼이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효도란 함께 모시고 사느냐 아니냐, 용돈을 얼마나 드리느냐, 얼마나 호강을 시켜 드리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참된 효도는, 오늘의 나를 있게 해 주신 부모님에 대한 긍지 여부에 따라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요즘, 자식들의 고민이 연로하신 부모님을 모시는 문제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가정이 한 둘이 아닙니다. 특히 맞벌이 부부라든지, 부모를 모실 수 있는 환경이 안 되어있는 분들은 요양원이나 시설에 보내는 것에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자!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자신을 낳아 주신 부모님이 단지 귀찮아서, 혹은 남의 손을 빌어 형식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양로원에 보내는 것은 물론 천륜을 어기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살아가는 자식이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부모님께서 노인들을 위해 특수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양로원에서 같은 또래의 노인들과 함께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시기에 양로원에 모셔다 드리고 정기적으로 찾아뵙는다면, 그것은 결코 불효가 아닙니다. 도리어 참된 효도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한 집에 모시고 살면서도 함께 사는 애완용 강아지만도 못하게 여긴다면, 그것이야말로 씻을 수 없는 불효입니다. 따라서 내 부모님의 재산이 얼마냐, 내 부모님이 얼마나 출세한 분이냐, 얼마나 배운 분이냐에 상관없이, 그 분의 자식으로 태어난 데 대한 긍지가 참된 효도의 필수조건이 됩니다. 부모님에 대한 사랑도 존 중도 섬김도 오직 이 긍지로부터만 비롯되는 까닭입니다.
셋째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25절에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명하십니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즐겁고 기쁘시게 하는 것은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기 보다는 염려와 근심거리가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부모님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려고 하면 무엇보다도 부모님의 마음을 잘 알아야 합니다.
실제로 늙어가면서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외로움입니다. 마치 빗살이 하나 둘씩 잘려져 나가듯이 사랑하며 살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노인들 곁을 떠나갑니다. 자식들이 결혼해서 떠나갑니다.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 둘씩 먼저 하나님 나라로 떠나갑니다. 평생을 사랑하며 살던 아내와 남편이 곁을 떠납니다. 이제 외롭게 남은 빗살 한 가닥처럼 홀로 남은 세월에 그 깊은 외로움이 밀려옵니다. 오늘의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손들과 떨어져 살고 있고, 갈수록 혼자 사는 비율이 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시와 학대 속에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수가 점점 증가하고 있습니다. 1999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매일 7명씩 자살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이제 좀 더 따뜻한 배려와 섬김이 필요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도 십자가의 그 고통의 한 복판에서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던 예수님께서 당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발견하셨습니다. 죽어가는 아들에게 어머니보다 더 그리운 존재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기에 두 팔을 벌리신 채, 당신 자신을 가리켜 어머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머님, 보십시오. 바로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그것은, 어머니 마리아가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 동정녀 처녀의 몸으로 당신을 잉태하고, 당신을 낳고, 당신을 키워 주었기에,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땅에 오시어 그리스도로서 구원의 사역을 완수할 수 있었다는, 어머니에 대한 주님의 긍지의 대선언이었던 것입니다. 동정녀 처녀였던 어머니가 내 어머니 되어 주지 않았던들, 그 모든 일이 가능할 수 없었다는 긍지로운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말씀 한 마디로 인해, 처녀의 몸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낳으므로 마리아가 세상사람들로 부터 겪어야만 했던 온갖 고초와 고난의 고통이 눈녹듯 사라졌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어머니에 대하여 이처럼 긍지를 갖고 계셨기에, 비록 주님께서 어머니와 떨어져 사셨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성만은 변할 수가 없었고, 바로 이 긍지로 인해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 하시며 당신 모친의 여생을 간절하게 부탁하실 수 있었고, 남의 손을 빌어 효도하려는 여타 인간들과도 구별되실수 있었고, 그래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계명이 예수님의 삶 속에서 성취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공통적으로 후회하는 것이 있습니다. 부모님 살아생전 효도를 다 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 나이들수록 그것을 예외없이 후회하게 되는지 아십니까? 이제 곧 죽으면 하나님과 먼저가신 부모님을 만나게 될 것임을 아는 까닭입니다. 효도라는 단어의 의미가 퇴색해 가는 비정상적인 세태 속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제5계명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아니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진정으로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의 내가 존재할 수 있게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주셨던 부모님에 대한 긍지를 찾으십시오. 비천한 달동네 나사렛 출신의 마리아가 단지 주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예수님의 긍지가 되듯이, 우리의 부모님이 아무리 늙고 병들고 볼품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치밀하신 섭리에 의해 우리 부모님이 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의 긍지가 될 충분한 자격을 이미 갖추고 계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에 대해 이 긍지를 갖고 있는 한, 설령 남에게 불효처럼 보이는 행동도 그 본질은 실은 효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긍지를 갖지 못한 자식이라면, 그가 부모에게 행하는 것들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또다른 불효의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녕 주님을 믿고 따른다면, 오늘부터 우리 모두 부모님을 향하여 주님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긍지로운 고백의 삶을 시작치 않겠습니까? `보십시오. 저는 바로 부모님의 자식입니다.' 그때 우리의 삶을 통하여 우리 부모님의 자식으로 우리를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아름답게 펼쳐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저는 오늘 이 메시지를 시작하면서 노인 학대의 이야기을 언급했습니다만 가장 잔인한 부모 학대, 노인 학대는 부모 앞에서 우리가 잘못된 인생을 사는 일입니다. 작가 조연경씨의 작품 중에 ‘효도별곡'이란 콩트가 있습니다. 서울에서 만두집을 경영하며 살아가는 젊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부는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오후 3시만 되면 어김없이 만두가게에 나타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얼마동안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만두집 부부는 그 할머니와 할아버지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매주 수요일 3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따로따로 만두집으로 들어선다든가, 식탁에 마주앉아 서로 쳐다보는 표정 등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대개는 할아버지가 먼저 오는 편이었지만, 비나 눈이 온다거나 날씨가 궂은 날이면, 할머니가 먼저 와서 구석자리에 앉아 출입문을 바라보며 초조하게 할아버지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만두를 시킨 뒤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만두를 먹을 생각도 않고, 마치 이별을 앞둔 젊은 연인들처럼 안타까운 눈빛으로 서로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생각난 듯 상대에게 황급히 만두를 권하다가 다시 눈이 마주치면, 눈에 눈물이 고이기도 하였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그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부지간 일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만약 부부라면 매번 만두집에 따로 나타날리도 없고, 만날 때마다 그처럼 서로 애절하게 쳐다보다가 헤어질 리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관계를 옛날 `첫사랑'의 관계로 잠정 결론을 내렸습니다. 몸은 늙어도 사랑은 늙지 않는 법이기에 나이 들어 우연히 재회한 첫사랑의 연인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 젊은 시절 이룰 수 없었던 사랑의 아쉬움을 나누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그날 따라 할머니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아 보였습니다. 병색이 완연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만두 하나를 집어 할머니에게 권했지만 할머니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따라 할머니는 눈물을 자주 닦으며 어깨를 들먹이곤 했습니다. 한참 뒤에 자리에서 일어나 만두 값을 치룬 할아버지는, 그날 만큼은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만두집을 나섰습니다. 곧 쓰러질 듯이 휘청거리며 걷는 할머니를 어미 닭이 마치 병아리를 감싸듯 감싸안고 가는 할아버지―그 두 노인의 뒷모습이 왠지 가슴 아프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수요일도, 또 그 다음 수요일에도 두 노인은 영영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만두집 부부는 궁금하기 짝이 없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여가 지난 어느 수요일 정각 오후 3시에, 할아버지가 문을 열고 만두집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었습니다. 부부는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얼굴은 예전과는 달리 몹시 초췌해 보였고, 진심으로 반가와하는 부부를 향해 할아버지가 답례로 보인 웃음은 울음보다 더 슬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만두집 여자가 물었습니다. "할머니도 곧 오시겠지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으면서 말했습니다. 죽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에 만두집 부부는 들고 있던 접시를 떨어뜨릴 만큼 놀랐습니다. 그리고 마치 독백하듯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할아버지의 사연을 듣고서는, 부부는 더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첫사랑의 관계가 아니라 어엿한 부부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수원에 있는 큰아들의 집에서, 할머니는 서울에 있는 둘째 아들의 집에서 각각 떨어져 살아야만 했습니다. 두 분의 사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식들이 싸운 결과였습니다. 큰며느리가 다 같은 며느리인데 자기 혼자만 시부모를 모두 모실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서는 바람에, 아들들이 공평하게 한 분씩을 모시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서울과 수원으로 생이별을 하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매주 수요일 세시만 되면 마치 견우직녀처럼 그 만두집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만나온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었습니다. "이제 나만 죽으면 돼, 천국에서는 같이 살 수 있을거야."
연로한 부모님을 생이별시켰던 그 자식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자식들에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들만의 피치 못할 절박한 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이것만은 부정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자식들이 부모에 대하여 긍지를 갖고 있었더라면, 부모로 인해 이 땅에 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었고, 부모의 희생과 헌신을 통해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음에 대한 긍지가 있었다면,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하다 못해 달동네 사글세 방이라도 얻어 함께 기거토록 해 드릴지언정, 그 어느 때보다도 삶의 반려자가 필요한 노부모를 생이별시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가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님은 내 존재의 뿌리입니다.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부모님이 자녀를 잉태하면 어떻습니까? 10개월 동안 오직 뱃속에 있는 생명을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 몸이 아파도 약을 먹지 않습니다. 행동거지 하나라도 태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까봐 노심초사합니다. 그리고 뼈가 녹아내리고, 살이 찢어지는 아픔을 감내합니다. 어머니의 생명을 건 사랑의 결과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키우시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습니다. 전쟁을 겪으시고, 보릿고개의 지독한 가난 속에서도 오직 자식 하나 잘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키우셨습니다. 당신들은 제대로 잡수시지도 못하셨지만 자식들은 배고프지 않게 살도록 허리끈을 졸라매고 온 정성을 다 쏟으셨습니다. 평생 동안 다 주시고도 더 주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것이 부모님의 심정입니다. 그 은혜를 안다면 우리는 당연히 부모님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동성의 여러분!
제가 학창 시절에 국문학 교수로 명성을 날리던 양주동선생님의 글 가운데 ‘어머니 마음?이라는 노래가 있지 않습니까? “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버이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를 길러주신 부모님의 희생적인 사랑을 생각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겠습니까? 땅 위에 그 무엇이 높다 하겠습니까? 인간의 그 무엇이 거룩하겠습니까? 어버이의 희생, 어버이의 정성, 어버이의 사랑보다 더 넓고, 높고, 거룩한 것은 없습니다. 부모님의 이러한 사랑이 없었다면 여기 자녀들이 오늘날과 같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오늘 성경은 모든 자녀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 부모를 순종하라고 그리고 공경하라고 말입니다. 순종이 부모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면 공경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모의 마음을 알아드리는 것입니다. 박은수라는 분이 쓴 어머니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머니
박은수
어머니는 좋은 옷이 필요치 않으신 줄 알았습니다.
예쁜 그릇도 갖고 싶지 않으시고
맛있는 음식에도 마음이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빛깔 고운 립스틱이나
꽃무늬 화려한 양산품
눈 여겨 보시지도 않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시집와서 마흔 고개에 다다르며
이제사 깨달아 집니다.
어머니도 여자이셨음을
어머니의 가슴에도 무지개가 있고 파랑새가 있고
사파이어 같은 꿈이 있음을/이제사 알아봅니다.
어머니
언제나 귀한 이름입니다.
언제나 우리맘속에 별처럼 살아있는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이날에 어머니를 그리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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