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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2025 2024~2009

자녀는 - 우리의 희망둥이입니다. - 신 6:4-9. 2014년 5월 4일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4-05-04 | 조회: 1461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아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 우리교회에서 자라나는 동성의 어린이들, 우리 성도들의 가정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번 세월호 침몰사건으로 인한 엄청난 인명피해는 인재라고 말합니다. 조속히 선실에 있는 승객들을 구명선박을 통해 탈선만 시켜도 이렇게까지 인명피해는 없었을텐데, 안타깝게도 배가 기울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선실이 더 안전하니 남아 있으라’고 기내방송만 되풀이 되는 바람에 소위 구조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더 분노하게 하는 것은 배와 승객들을 남겨놓고, 선장이 먼저 탈출했다는 사실입니다. 위기상황에서 선장의 판단은 생명과 직결됩니다. 마지막 승객의 안전까지 책임지는 것이 선장의 의무입니다. 축구감독에겐 운동장이 성전(sanctuary)이며, 판사에겐 법정이 성전이듯이 선장에겐 선박이 그의 성전입니다. 그의 전문적 지식과, 선박구조의 이해가 가장 절박한 순간에 그 자리를 피해 탈출할 수 있었는지, 너무 통탄하기까지 합니다.

자주 교회를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 한척에 비유되곤 합니다. 짐을 나르는 화물선도 있고, 놀이기구에 수영장까지 준비된 유람선도 있습니다. 그리고, 군사작전을 위해 팬텀비행기와 화포를 장치한 떠다니는 도시같은 항공모함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배일까요? 저는 이번 침몰사건을 보면서 우리교회가 구조선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식수와 따뜻한 음식, 응급의료시설을 갖춘 구조선이었면 좋겠습니다. 거친 바다에서 표류하며 “살려달라”는 외침에 즉시로 손내밀어 구조해 낼 수 있는 구명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새로오신 분들은 ‘동성’구명선에 올라탄 자원봉사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같이 한 배를 타고, 춥고 어두운 바다 같은 세상에 따뜻한 사랑과 빛을 비추는 자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베드로를 갈릴리 바다에서 건져올리셨던 예수님의 손길이 오늘 바로 나를 건져올리셨기에, 그 사랑에 감사하며 남은 인생은 같이 ‘구명’하는 동성호를 타고 항해를 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Master and Commander” 위대한 정복자란 영화에 보면 영국의 국운이 달려있는 해전에서 선장이 했던 말이 있습니다. “This ship is England(이 배가 영국이다)!” 저는 동성호 항해를 선장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자로서 선포합니다. “이 동성호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는 생명선으로서 사명을 다하기까지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내기 위해 불을 밝힐 것입니다. 골든타임을 놓치게 하는 잘못된 방송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끝까지 배와 동성호의 승객들을 지킬 것입니다.

저는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과연 우리 아이들 제대로 자라고 있는가? 하는 생각에 한 주간을 보냈습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어린이들이 어린이로 대우받지 못하고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 지난 4년 전 우리나라를 열광시켰던 월드컵의 뒷 이야기 가운데 가슴 아픈 소식이 하나 있었습니다. 월드컵 때 사용된 공을 '피버노바'(Fevernova)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 공이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어린아이들이 하루에 12시간-16시간씩 중노동을 해서 만들어졌다고 알려지면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12-16시간씩 중노동을 한 인도의 아이들은 하루에 약 30루피(700원 정도)씩 받았는데, 이 돈으로는 우유 1리터와 빵 한 조각을 사기에도 부족한 돈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적은 돈을 받고 일을 한 어린이들은 손에 지문이 다 문드러져 없어지고, 화학물질 때문에 시력을 잃고 실명을 하기도 했고, 열악한 작업환경 때문에 류마티즘에 걸려 고통당하기도 했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어린아이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셨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18:1절에 보면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우리에게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이들, 이름만 불러도 설레이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오랜 시간 진통 끝에 아이를 난 한 성도의 병원에 심방을 간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이난 기쁨 때문에 그 간의 고생은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 잊어버리고, 연실 아이를 보며 싱글 벙글 합니다. 비단 이 가정뿐이겠습니까? 각 가정마다 아이들을 선물로 받으면 기쁨이 집 안을 진동시킵니다. 그 아이들이 방바닥을 기고 걸음마를 시작하면 웃음이 저절로 넘쳐납니다. 몇 살이 안 되어 글자라도 읽고 그림이라도 어설프게 그리면 집안에 천재가 났다고 박수를 치며 좋아합니다. 사람은 아이일 때가 제일 이쁘고 사랑스러운 존재들입니다. 악이 무언지도 모르고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일도 없으며 품에 안길 뿐이니 이때처럼 귀여울 때가 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소년기와 청년기로 들어가며 성장하고 나면 얘기는 아주 달라집니다.

어릴 때 그토록 사랑스럽던 자식이 뿔난 소처럼 치어 받으며 부모에게 불순종하고 사회에 반항하고 이런 저런 문제들을 일으키는데 어느 부모의 표현처럼 “이럴 줄 알았으면 무자식이 상팔자일 뻔했다” 라는 탄식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비로소 인간 이란 존재가 자식이든 배우자든 남자든 여자든 만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이제 가정의 달을 맞이해서 우리의 자녀 어떻게 키울 것인가, 이 문제는 어느 누구 예외없이 다 자녀에 대한 부담이 있습니다. 다 잘 키우고 싶고 시대 앞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길 원합니다.

여러분도 잘 알겠지만, 우리 한국인의 지능지수는 평균 106으로 나라로 보면 세계 최고입니다. 반면 이스라엘의 지능지수는 평균94로 45위에 그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학생들과 비교해도 우리 학생들은 훨씬 더 오래 책상에 앉아 공부합니다. 교사들의 수준도 세계 최고입니다. 유대인들의 교육열이 높다고 하지만 ‘기러기 아빠’가 생길 만큼 극성스런 우리의 교육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국인의 지능도 세계 최고이고, 공부하는 시간도 세계 최고이고, 교육열도 가히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는데, 그 결과는 이스라엘과 비교해서 영 신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노벨상이 평화상 1명에 불과하지만, 유대인은 현재 스스로 유대인이라 밝힌 경우만 해도 185명으로 노벨상의 22%에 이릅니다. 유대인이라고 밝히기를 꺼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 숫자까지 합하면 30%에 이를 것으로 봅니다. 미국 아이브리그 대학에 입학하는 한국계 학생이 1%가 될까 말까 하는 데 반해, 유대인은 3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구가 남북한 합쳐 8,000여만 명의 한국인과 1,500여만 명의 유대인을 비교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어떤 한두 분야가 아니라 각계각층에서 괄목할 만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0세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아인슈타인이나 프로이트, 카를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스피노자, 샤갈, 카네기, 키신저, 스필버그, 찰리 채플린, 로스차일드, 골드만삭스, 조지 소로스, 그린스펀, 버냉키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사람들 중에는 유대인이 아주 많습니다.

왜 우리는 세계 최고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서도 세계적인 인물을 배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유대인은 왜 우리와 비교해서 결코 좋은 조건이 아님에도 세계적인 인물이 이렇게 많은 것입니까? 왜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낳고 아이비리그에 그렇게 많이 들어가며, 각계각층에서 두각을 나타내는가?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가? 그 비밀은 하브루타에 있습니다.


하브루타 - 이 말은 어떤 주제를 가지고 끊임없이 토론하고 논쟁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거기에 대한 분명한 자기 정립을 가져 오는 교육입니다. 그들은 어떤 문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지만 거기서 이런 답을 얻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우리만이 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확신하는 것이 4가지인데

1.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다’이라는 것입니다.
2. 그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3. ‘그 말씀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4. 다음세대에게 가르치라 는 것입니다.

이런 분명한 목표와 방향이 그들의 삶에 배여 있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비전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토론 속에서 판단력과 창의적 능력이 생깁니다. 그리고 위기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기회를 만들어 냅니다. 그들의 생애에 어떤 어려움과 난관이 있어도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 앞에 하나님 주신 꿈을 갖고 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무엇을 소유했고, 어떤 위치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떤 꿈을 붙잡고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비전을 품고 사는 자는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분명한 삶의 기준과 푯대를 가지고 삽니다. 어떤 유혹과 어려움이 와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이 이뤄질 때 까지 계속 달려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도 적은 나라지만, 세계를 움직이는 사람들이 배출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함께한 이 신명기 6:4-9절 말씀, 쉐마- 들으라!! 이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 보면 세 가지 강조점이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부모가 자녀를 대할 때, 세상에서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당시 중동사회가 다신론이요, 범신론이요 자연숭배에 빠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저들의 문화에 빠져들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부모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좋은 신앙인이 되는 일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교육입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본 그대로 믿고 행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부모만한 교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링컨은 “하나님을 진실히 믿는 부모를 가졌다면 그는 부자다”라고 했습니다.

링컨은 위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그의 생애를 연구한 전기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훌륭한 지도자가 될만한 그 어떤 조건도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두 가지를 주셨다. 하나는 가난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어머니였다.” 한번은 링컨이 자기의 가장 절친한 친구 빌리 헌던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나는 어려서 글을 잘 모를 때부터 어머니가 성경 읽어주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지금도 내 마음 속에서 통나무 집에서 어머니가 성경 읽는 소리, 기도하는 소리가 울리고 있다. 오늘 나에 게 속한 모든 것은 천사 같은 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네.”

2. 부모가 두 번째 할 일은 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입니다. 6-7절을 보면 “오늘 내가 네게 명하신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가르쳐라“고 했습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쳐야할 때 고치지 못하면 더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특히 어렸을 때 분명한 신앙의 가치관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절대로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떼를 써도,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안 되는 것은 안됩니다. 분명한 훈계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훈계를 해야할 때 훈계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무분별한 사랑은 버릇없는 아이,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아이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부모 된 우리는 자녀들에게 먼저 본을 보이는 교양으로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교양과 훈계를 하되 전제가 있습니다. 엡6:4절을 보면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나의 가정을 돌아보십시오. 이 경건의 모양이 적고 모두 세속적인 요소들이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아이들이 조금만 크면 TV를 보고 춤부터 배우고 흉내를 냅니다. 아주 어린 아이들이 어른들이 추는 춤을 흉내부터 냅니다. 그 모습을 보면 전혀 아이답지 않은데도 부모들은 잘한다고 칭찬을 합니다. 그게 칭찬할 일입니까. 그리고 아이들이 TV에서 총 쏘는 것만 보고 자라서 아이들이 하루 종일 총 들고 다니며 죽이는 흉내만 냅니다. 그러면 부모들은 매일 몇 번씩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매가 있습니까. 경건이 있습니까. 절제의 교육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오늘 끔찍한 청소년 문제들이 쉴 사이 없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미국 정부가 아이 하나를 낳아 키우는 비용을 산출했는데 중산층 가정에서 아이 하나를 낳아 한살부터 18세 까지 아이를 키우는데 총 비용이 160,140불, 우리 돈으로 1억 6천만 원이 들어간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이 비용은 과외비와 학비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것까지 합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3억 원도 넘을 것입니다. 장차 돈 모아 잘 살려면 자식 낳지 말아야 합니다. 자식 하나를 양육하는데도 돈도 돈이지만 정성이 들어야 합니다. 화초 하나를 기르더라도 햇빛이 잘 들고 통풍이 잘 되는 좋은 환경에서 자라야 소담한 꽃봉우리를 피워내는 법입니다.


여러분, 우리 부모가 자녀에게 물려 줄 가장 위대한 유산은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세상 교육에 투자하는 것의 10분의 1이라도 마음과 정성을 들여서 자녀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복 주신다고 했습니까?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고 했습니다.


3. 부모가 할 일은 실천하게 하는 일입니다. 8-9절을 보면 가르치는 일 뿐만 아니라 “너는 이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교육에서 가장 큰 맹점이 말만 앞서고 실천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거역하는 것도 언제나 부모들이 말만 앞서고 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샌디 워너(Sandy Warner)라는 기독교 동화 작가의 독수리 이야기에서 부모 독수리가 아기 독수리와 작별하는 순간의 묘사로 저는 오늘의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부모 독수리는 자녀 독수리가 부모의 품을 떠날 때가 가까웠다고 느끼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자녀 독수리를 비상시키는 훈련을 한다. 그리고 아기 독수리 곁을 나르며 이렇게 말한다. “넌 이제 혼자 날 수 있어, 다음에 우리는 네가 나르는 그 멋진 모습을 저 높은 곳에서 지켜 볼 것이야. 아빠 엄마의 도움이 필요하면 우리에게 보내는 특별한 소리와 함께 네 비상 도움을 요청하는 날개 짓을 하면 되는 거야. 아빠 엄마는 언제라도 너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어. 하지만 너는 곧 너의 아기 독수리를 키우기 위해 우리를 당분간 잊어 버려도 될 거야. 그래도 괜찮아. 그것이 자연의 순리이기 때문이지. 다만 먼 후일 언젠가 우리가 보고 싶으면 넌 저 광야의 골짜기로 내려오면 돼. 거기서 넌 너의 늙은 아빠 엄마 독수리를 다시 볼수 있을 거야.

아빠 엄마는 늙으면 더 이상 이 높은 곳에서 살수 없거든. 하지만 그때에도 아빠 엄마 독수리는 너를 알아보고 저 골짜기에서도 너의 멋진 비상을 응원하며 박수를 보내고 있을거야” 그리고 이 말과 함께 마침내 부모 독수리는 그동안의 익숙했던 자신들의 둥우리를 해체하는 작업을 시작한다. 그리고 아기 독수리를 사정없이 밖으로 밀쳐 낸다. 더 먼 곳으로 더 멀리 비상하도록 말이다. 그리고 다시 부모 독수리는 허공을 가르는 큰 소리로 외친다. 그것 봐! 넌 할 수 있어! 넌 할 수 있어! 우리보다 더 멋지게 나는 거야!]


사랑하는 여러분! 자녀의 인생을 부모가 대신 살아 줄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녀들이 주께로부터 받은 재능과 은사를 계발하여 하나님이 그들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신 그 인생을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떠나보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못다 이룬 인생을 자녀들에게 강요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할 일은 내가 만난 예수를 자녀들에게 평생을 전하고 가르쳐야합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세우고 그들의 삶 속에 예수의 향기를 가지고 살게 해야하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야 할 그들의 인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어느 날 미련 없이 떠나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그 떠남의 날을 생각하며 오늘 당신의 자녀들을 위한 최선의 준비가 무엇인가를 기도하십시오.
그들은 우리의 희망둥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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