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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주설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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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의 회복과 열정(롬12:3-8) 2012.1.29

작성자: 관리자 | 등록일: 2012-01-31 | 조회: 1534
참 세월이 빠르지 않습니까? 벌써 1월 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뭔가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식이 지금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총선과 대선을 앞둔 정치인들을 보면 모두가 위기의식에서 어떤 돌파구를 찾으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지 않습니까? 철밥통으로 알려진 신비의 영역인 법조계도 한 영화 상영으로 인해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이번에 서울시 교육감이 학생인권조례안을 공포하자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즉각 대법원에 조례 무효 확인 소송을 내고 집행정지를 신청하며 강력 저지에 나서면서 교육계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학교는 교권과 인권의 정체성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지금 교회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며칠 전에 신문을 보다가 너무나 가슴 아픈 기사를 봤습니다. 서울 시내에 교회 십자가를 달았다가 문을 닫는 교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통계적으로 100개 개척교회가 세워지면 5개 정도의 교회가 유지된다고 합니다. 서울에 매물로 나와 있는 교회가 300여개가 된답니다. 문제는 교회가 문을 닫으면 그것을 절에서 구입하여 포교원으로 사용한답니다. 기가 막힌 것은 교회의 상징과도 같은 십자가 철탑을 그대로 재활용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끝에 쇠막대를 덧붙여서 절을 표시하는 만(卍)자를 붙인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십자가가 절로 바뀌는 안타까운 시대입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흥의 기회를 주셨는데 우리가 그것을 바로 사용하지 못한 책임도 크다는 것을 통감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통계를 보고 그냥 우리가 주저앉거나 현실 앞에 무력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문제가 있느냐 없느냐, 이것보다 그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우리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문제없는 교회를 찾아 나섭니다. 하루는 무디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상담을 합니다. "무디 선생님, 문제없는 교회를 저에게 좀 가르쳐 주세요. 제가 세 번이나 교회를 옮겼는데 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무디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제가 문제없는 교회를 알긴 아는데 추천을 못해 주겠다."라고 했어요. "왜 못해 줍니까?" "제가 당신을 그 교회에 소개해 주는 그 날로 그 교회는 문제가 생길 테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의 존재 목적은 사람을 세우는 곳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사망 진단을 받은 자들을 예수의 보혈의 생명으로 살려 그들의 거룩한 강자로 세워 세상에 나가 생명을 살리는 일을 감당을 해야 합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건강한 교회에 모델이 되고 있는 새들백 교회에 릭 워렌 목사님이 쓴 '목적이 이끄는 교회'를 보면, 파도타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파도타기 선수가 아무리 파도타기를 잘 해도 파도 그 자체를 만들 수 없듯이 목사나 또는 재주 많고 실력 있고 믿음 좋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부흥 그 자체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 파도의 물결을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만 보내주실 수 있는 것처럼, 부흥의 물결은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파도가 거칠수록 실력 없는 이들에게는 위협적이고 위험할 수 있지만, 파도타기 선수들, 그 중에서도 실력 있는 선수들에게는 거칠수록, 클수록 파도타기의 묘미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위기는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교회부흥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는 것이고 세째는, 하나님께서 아무리 부흥의 물결을 보내 주셔도 그 기회를 놓치는 사람에게는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 넷째는, 파도타기에서 중요한 것은 '균형을 잡는 것'처럼, 주님의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균형을 잡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파도가 거칠수록 실력 없는 이들에게는 위협적이고 위험할 수 있지만, 파도타기 선수들, 그 중에서도 실력 있는 선수들에게는 거칠수록, 클수록 파도타기의 묘미와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위기는 준비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교회부흥을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는 좋은 기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보시면,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 안에서 봉사 생활할 때 다양한 은사를 주셨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도 아시지만, 교회 공동체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신앙은 개인적일 수 있을지 몰라도, 신앙적인 삶은 절대로 개인적일 수 없습니다. 개인적일 수 없는 신앙인의 교회생활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몸'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본문 4-6절에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여기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다는 말은 주님의 몸 된 그리스도 안에 다양한 기능을 가진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1. 은사는 비교의식과 경쟁의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손과 발 중에 어디가 더 중요할까요? 손과 발은 비교되는 지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기능을 위해 존재하는 상호 보완적인 지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사람들의 외적 조건에 따라 나보다 나은 사람과 못한 사람들의 평가를 하기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람들을 성경적 방식으로 바라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은사에 따라 사람 바라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각기 다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라는 의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지체라는 의식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지체들의 각기 다른 역할을 존중하는 순간 우리는 피차에 비교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르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일-이것이 건강한 교회 사역의 시작입니다.

6절을 다시 보면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그렇습니다. 지금 교회 공동체 안에 당양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은사의 다양성- 이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 안에 대부분의 성도는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 별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교회 나와서 예배드리고, 똑같이 헌금하고, 똑같이 교회에서 봉사하는데 무엇이 다르냐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 일은 하도록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만 주신 특별한 기능과 역할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은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잘 섬기라고 성령께서 지체된 우리에게 사람 따라, 믿음의 분량대로, 거기에 합당한 은사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은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3절을 함께 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여기 ‘믿음의 분량’ 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크기를 먼저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는 크기와 함께 내가 받은 직분이나 은사의 종류를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 “지혜롭게 생각하라”는 말씀의 본래 뜻은 “냉철한 판단” 또는 “건강한 판단”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냉철한 판단에 근거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믿음의 분량을 생각하라”는 뜻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몸을 생각해 보십시오. 지체 중에서 발은 늘 감추어져 있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다른 지체들을 지탱해 주고, 옮겨 주고, 험한 일은 다하면서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한 뇌, 심장, 위장, 간 등 우리 생명과 직결된 장기들은 모두 감추어져 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는 지체는 얼굴과 손 정도입니다. 온몸의 지체들이 각각 수고를 해도 영광은 얼굴이 다 받습니다. 성대와 입을 이용해 노래를 불러도 신문에는 얼굴이 납니다. 입만 찍혀서 나오는 법은 없습니다.



축구선수가 발로 뛰어다니며 축구를 해도 신문에 축구선수의 발만 나오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발이 할 일을 안 하고 파업을 합니까? 얼굴만큼 인정을 못 받는다고 장기들이 파업을 합니까? 얼굴이 드러나서 모든 영광을 혼자 다 받는다고 해도 사실 얼굴만큼 노출의 위험이 큰 것도 없습니다. 어느 공동체에서든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영광도 많이 받겠지만 그만큼 책임 부담이 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얼굴의 역할을 하든지 발의 역할을 하든지 한 몸이 된 지체는 모든 것을 함께합니다. 눈이 아름다운 것을 보면 온몸이 함께 즐겁습니다. 다른 몸을 가진 사람은 뼈가 부러져도 느끼지 못하는 아픔을, 한 몸에 있기 때문에 가시 하나가 박혀도 함께 느끼고 함께 아파합니다. 서로 기뻐하고, 서로 즐거워하고, 서로 슬퍼하는 것이 지체인데 얼굴이 영광 받는다고 혼자 커 버리고, 엄지손가락이 중요하다고 혼자 있는 대로 자라 버리면 기형이 됩니다. 세포 중에서도 다른 세포와 관계없이 제멋대로 크는 것이 암세포입니다. 혼자 잘난 척을 하면 자신도 죽고, 몸을 죽이고, 집안을 죽이고, 교회를 죽입니다. 여러분, 괜히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 마십시오. 내게 없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 있잖습니까? 저도 열등감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음악을 못하는 것입니다. 때로 설교하다가 중간에 찬양을 한 번 뽑았으면 좋은데, 첫음을 잡을 자신이 없어서 주저 앉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음악을 그저 음악이라고 생각하고 자라난 사람입니다. 제가 예수를 영접하고 여러 사역을 해 보았지만 제 기억에 꼭 한 가지 제대로 못해 본 게 있습니다.



청년 시절에 가장 많이 콜을 받는 것이 성가대 자리입니다. 그런데 저도 교회 생활을 할 때, 성가대에서 엄청 요청이 왔습니다. 못한다고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십니다. 나중엔 거의 협박 수준입니다. “안형제, 교회생활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성가대를 앉았는데 저는 베이스파트에 앉았는데 당시 제 옆에 테너를 잘 하는 분이 셔섰습니다. 베이스는 베이스인데 제가 바로 테너 옆자리에 앉게 되어 저는 오른쪽 사람을 쫓아가다 왼쪽 사람을 쫓아가다 하는 혼돈으로 괴로웠습니다. 저는 지금 여기 앉아 찬양하는 성가대를 존경합니다. 자기의 은사를 정확하게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2. 나의 은사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여기 모인 여러분 중에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약 은사를 못 받았다면 그 사람은 지체가 아닌 것입니다. 지체라면 반드시 자기역할을 할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은사를 주십니다. 우리는 은사를 받은 대로 일을 해야 합니다. 각자에게 주신 은사를 묻어두고 가만히 있으면 안됩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나중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주님의 호된 꾸지람을 듣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6하-8절에 중요한 7가지 은사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은사가 7가지뿐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다양한 은사 중에 몇 가지 예를 들었는데 어떤 성경학자는 이것을 성도로 하여금 모든 봉사의 동기를 형성케 하는 동기적은사라고 얘기 했습니다. 다 같이 보십니다.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 가운데 어떤 은사를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은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도록 예를 한 번 들어 보겠습니다. 어느 날 7가지 은사를 각각 가진 7사람이 중국식당에 갔다고 가정을 해 봅시다. 중국식당에 가면 둥근 테이블에 각기 다른 은사를 가진 사람 7이 쭉둘러 앉아서 식사를 합니다. 그런데 웨이트리스가 접시를 가지고 음식을 날아오다가 중간쯤에서 그만 의자에 발이 넘어져 접시를 깨뜨렸습니다. 그 식기가 깨진 것을 보고 일곱가지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 각기 어떻게 다른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먼저, 예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은 뭐라고 반응했겠습니까? 예언의 기능 가운데 하나는 틀린 것을 교정하는 것입니다. 사회의 오류 같은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예언자들은 책망하고 교정합니다. “당신, 정신은 어디다 두고 그렇게 손님을 모욕하는 법이 어디 있어? 이 다음부터 주의해서 행동하시오” 교회에서 야단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대게 예언의 은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섬기는 은사의 사람입니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아마 바로 달려가서 그 접시를 줍고 그녀를 일으켜 줄 것입니다. ②.가르침의 은사가 잇는 사람은 “아가씨 가만히 보니까 이 식당에 공간이 많이 남아 있는데 조금씩 식탁을 뒤로 밀면 충분히 공간이 남습니다. 그러면 절대 넘어지지 않습니다. ”하고 조언할지 모릅니다. 그 조언의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④.권위의 은사(권면하고 위로하는 은사)는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기왕에 깨먹은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앞으로가 중요하지요” 이런 식의 미래 지향적인 사고로 사람을 돕고자합니다.⑤.다스리는 은사는 지금의 이상향 앞에 침착하게 모든 것을 정리하려고 애를 씁니다.



구제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이겠습니까? “자매님, 그 접시값 얼마예요? 제가 대신 드리지요.” ?. 궁휼의 사람은 “어휴, 저걸 어떡해? 자매, 어디 다치지 않았어? ?찮아요? 하면서 같이 안타까워해주고, 대에 따라서는 같이 울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막상 접시를 깬 이 자세의 입장에서 정말 실제적인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을 일곱 가지 중에서 하나남 뽑는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정답은 일곱 가지 도움이 다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은 중국식당이 아닌 교회로 옮겨봅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람들이 다 다릅니다. 그래서 문제를 접근하는 방법도 다르고 해결방식도 다릅니다. 그러나 다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필요한 것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있어야 되고 함께 교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하고 다른 사람을 보면 “나는 형제 같은 사람이 내 곁에 있으니까 든든합니다. 참 도움이 되네요”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안 가진 것들 때문에 남들을 질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안가진 것을 가진 자매와 형제들이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엄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나의 은사를 발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중국식당의 예화에서처럼 쉽게 발견이 되겠습니까? 아주 쉽게 말하면, 은사는 대부분 자기가 좋아하는 일입니다.



본래 은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이 단어의 어근은 ‘카라’에서 나왔는데 그 뜻은 ‘기쁨’입니다. 음악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은 음악을 하지 못하면 못 견딥니다. 그것을 해야 기쁘고 신이 납니다. 사람은 자기 은사에 맞는 일을 할 때 진솔한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기뻐할 수 있는 일,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일, 내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리 나의 환경이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이일을 할 때 감격이 일어나고 감사가 나오며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 은사로 섬기는 봉사에 진력을 다하게 됩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이 일을 감당하므로 유익을 주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내가 받은 은사를 발견했습니까? 대단하게 튀는 능력이 아니라도 내가 할 줄 아는 기술과 지식, 솜씨들이 하나님이 내게 특별히 주신 진정한 은사임을 알고 있습니까? 내 은사가 하나님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쓰이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동성교회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되게 하셨습니까?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지역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길 원하셨기 때문 아닙니까? 내가 동성교회라고 하는 주님의 몸에 붙은 한 지체로서 주님의 팔이 되고, 주님의 다리가 되어서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려고 나를 불러주신 것입니다.



나는 오늘 이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작년에도 미국을 다녀 와 보았지만, 불경기고 금융위기고, 실업자의 수가 많은 표면적으로 정말 경기침체로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저력은 무시못합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우리처럼 단일민족이 아닙니다. 그 큰 대륙에서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다양한 민족이 모여서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강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을까? 단일민족은 아니지만 다양한 민족이 모여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통일성을 가진 국민으로 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1988년도 대선 때 민주당 후보로 흑인인 잭슨 목사와 듀카키스가 나왔습니다. 당시 잭슨 목사는 듀카키스에게 패배했지만, 그가 했던 연설은 길이 후대에 남을 만한 명연설이었고, 이것이 그들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의 연설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마이큰 듀카키스는 양친 중 한분은 의사셨고, 한 분은 교사였습니다. 나의 부모는 하인이었고 미용사였고 경비원이었습니다. 듀카키스는 법률을 나는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둘 상이에는 종교, 지역, 인종의 와이, 경험과 관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란 나라의 진수는 우리가 하나가 되는 그 다수의 차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와 나의 오솔길이 한 곳에서 만나도록 한 것입니다. 듀카키스의 선친은 이민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나의 선조는 노예선을 타고 미국에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둘의 앞 세계가 무슨 배를 타고 미국에 왔든지 간에 그와 나는 지금 같은 배에 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한 가지 실, 한 가지 색깔, 한 가지 천으로 짜여진 담요가 아닙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보냈던 나의 유년시절, 나의 어머니는 담요 한 장 미련해 주지 못하셨지만 어머니는 슬퍼하지 않으셨고 우리는 춥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머니께서는 털 헝겊이나 방 수천, 부대자루 등 구두나 닦을 수 있는 조각천들을 모아서 그것으로 훌륭한 누비이불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힘과 아름다움과 모양을 상징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누비이불’을 건설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미국의 힘은 바로 이 ‘누비이불’과 같은 다양성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잭슨 목사는 말했습니다. 우리 교회도 다양한 사람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이 다양한 사람들이



교회 담임목사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습니다. 찬양대원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휘자의 손끝을 봐야 합니다. 얼굴 표정을 보고, 눈빛도 바라보면서 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지휘자를 보지 않고 악보만 보며 노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과 맞지 않습니다. 지휘자의 손짓에 따라 모두가 하나처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연락하고 상합할 줄 알때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도 남의 도움 없이 혼자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교회는 몇몇 사람이 잘 되어서 건강한 교회 되는 것이 아니고 다 함께 하나되는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 줄 믿습니다. 2012년도에 우리 교회가 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일을 누가 해야 합니까? 이제 일어나십시다. 이제 나의 은사가 어떤 것인지 잘 알아서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즐거운 봉사, 즐거운 섬김으로 정말 행복한 사역을 감당하므로 아름다운 열매가 가득 맺혀지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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